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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복서에서 멋진 사회인으로...이해정의 성실

24.03.31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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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백병원에서 찾아온 손님

봄기운이 완연하던 3월 중순 주말에 귀한 손님이 체육관을 방문해 오찬과 함께 담화를 나눴다. 주인공은 서울 상계 백병원 협력진료센터 이해정 팀장이었다. 필자의 '30년 지기 이해정'은 컴퓨터 복서 허영모와 함께 고교생으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마지막 선수다.

1963년 1월 충남 대천에서 태어난 그는 1978년 대천서중 2학년 때 복싱에 입문했다. 입문하자마자 그해 3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전국학생 신인대회(라이트급)에 출전, 3연승(1KO)을 거둔 후 결승에 진출해 김영준에 판정패했다. 이 패배가 그에겐 약이 됐다. 승부욕이 발동한 이해정은 본격적으로 훈련에 매진, 1979년 제3회 김명복 배를 재패하면서 학생대표로 선발됐다. 이어 박재규 경남대 총장의 주선으로 대만 원정도 경험했다. 1980년 서울체고에 입학한 이해정은 김창석 선생의 조련을 받으며 한뼘씩 성장했고 그해 30회 학생선수권 라이트미들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은사인 김창석 선생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밴텀급)로 출전한 복서 출신이었다.
경쾌한 스텝의 클레버 복서 이해정

1981년 제31회 학생선수권 라이트미들급 2연패에 성공한 이해정은 제62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체급인 71㎏ 라이트 미들급에 1년 선배 한병호가 버티고 있었고, 한 체급 아래인 67㎏ 웰터급엔 역시 1년 선배 정용범이 건재했다. 자신이 뛸 체급은 75㎏ 미들급밖에 없었다. 울며겨자먹기로 이해정은 선배들에 밀려 미들급으로 출전했다.

이해정의 복싱 스타일은 전형적인 미들급 선수들과는 달랐다. 묵직한 한방은 없지만 발레리나처럼 경쾌한 스텝으로 상대를 현혹하다가 찬스가 생기면 면도날처럼 예리한 카운터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형적인 클레버(Clever) 복서였다. 전국체전의 결승전 상대는 훗날 복싱사상 최초로 1984년 개최된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전북 대표 신준섭이었다. 신준섭은 그해 미들급에서 제5회 김명복배 준우승과 제31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남원농고 3학년 선수였다. 이 대결에서 이해정은 한차례 다운을 탈취하면서 판정승을 거두고 귀중한 금메달을 획득한다. 미래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일찌감치 제압한 것이다.

다음해 5월 이해정은 제6회 김명복배에서 우승하면서 한국체대로 진학을 확정했다. 그리고 한 단계 도약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체급을 낮춰 뉴델리아시안게임 선발전에 라이트미들급으로 출전했다. 결승전 상대는 그해 3월에 개최된 제10회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현역 국가대표 김의진이었다.

김의진은 1981년 김명복배와 전국체전 라이트미들급을 평정한 후 1982년 3월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제2회 월드컵대회 동메달리스트 최우진에 2회 35초만에 KO승을 거두고 대표팀에 승선한 강자였다. 경기 전 예상은 피지컬이 우월한 김의진의 8대 2 압도적 우세였다.

이해정은 판정으로만 패해도 성공이라는 편안한 마음자세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공이 울리자 절대적인 열세였던 이해정은 스커드미사일처럼 위력적인 펀치를 뿜어내는 김의진을 맞아 철저한 히트 앤드 어웨이(Hit and away) 전술로 맞대응했다. 이 전략이 제대로 먹히면서 이해정은 대이변을 연출했다. 경기를 판정승으로 끝낸 그는 허영모와 함께 '유이하게' 고교생 국가대표로 대표팀에 합류한다.

한국 아마복싱 전성기를 함께 하며

그리고 그는 뉴델리아시안게임 본선 결승에서 시리아의 아드리스를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이는 1958년 동경아시안게임에서 김기수가 고교생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컴퓨터 복서 허영모와 함께 마지막 고교생 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로 등재됐다. 당시 한국은 사상 최초로 12체급 전 체급에서 준결승에 진출했고 금메달 7개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6회 대회(1970년 방콕)에서 획득한 최다금메달 6개를 경신한 것이었다.

경쾌한 스텝의 클레버 복서 이해정

1981년 제31회 학생선수권 라이트미들급 2연패에 성공한 이해정은 제62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체급인 71㎏ 라이트 미들급에 1년 선배 한병호가 버티고 있었고, 한 체급 아래인 67㎏ 웰터급엔 역시 1년 선배 정용범이 건재했다. 자신이 뛸 체급은 75㎏ 미들급밖에 없었다. 울며겨자먹기로 이해정은 선배들에 밀려 미들급으로 출전했다.

이해정의 복싱 스타일은 전형적인 미들급 선수들과는 달랐다. 묵직한 한방은 없지만 발레리나처럼 경쾌한 스텝으로 상대를 현혹하다가 찬스가 생기면 면도날처럼 예리한 카운터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형적인 클레버(Clever) 복서였다. 전국체전의 결승전 상대는 훗날 복싱사상 최초로 1984년 개최된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전북 대표 신준섭이었다. 신준섭은 그해 미들급에서 제5회 김명복배 준우승과 제31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남원농고 3학년 선수였다. 이 대결에서 이해정은 한차례 다운을 탈취하면서 판정승을 거두고 귀중한 금메달을 획득한다. 미래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일찌감치 제압한 것이다.

다음해 5월 이해정은 제6회 김명복배에서 우승하면서 한국체대로 진학을 확정했다. 그리고 한 단계 도약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체급을 낮춰 뉴델리아시안게임 선발전에 라이트미들급으로 출전했다. 결승전 상대는 그해 3월에 개최된 제10회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현역 국가대표 김의진이었다.

김의진은 1981년 김명복배와 전국체전 라이트미들급을 평정한 후 1982년 3월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제2회 월드컵대회 동메달리스트 최우진에 2회 35초만에 KO승을 거두고 대표팀에 승선한 강자였다. 경기 전 예상은 피지컬이 우월한 김의진의 8대 2 압도적 우세였다.

이해정은 판정으로만 패해도 성공이라는 편안한 마음자세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공이 울리자 절대적인 열세였던 이해정은 스커드미사일처럼 위력적인 펀치를 뿜어내는 김의진을 맞아 철저한 히트 앤드 어웨이(Hit and away) 전술로 맞대응했다. 이 전략이 제대로 먹히면서 이해정은 대이변을 연출했다. 경기를 판정승으로 끝낸 그는 허영모와 함께 '유이하게' 고교생 국가대표로 대표팀에 합류한다.

한국 아마복싱 전성기를 함께 하며

그리고 그는 뉴델리아시안게임 본선 결승에서 시리아의 아드리스를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이는 1958년 동경아시안게임에서 김기수가 고교생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컴퓨터 복서 허영모와 함께 마지막 고교생 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로 등재됐다. 당시 한국은 사상 최초로 12체급 전 체급에서 준결승에 진출했고 금메달 7개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는데,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6회 대회(1970년 방콕)에서 획득한 최다금메달 6개를 경신한 것이었다.

귀국한 선수단은 청와대를 예방,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200만원, 정주영 대한체육회장으로부터 180만원, 김승연 대한복싱협회 회장으로부터 100만원의 격려금을 각각 받았다. 1954년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한국은 그해 육상에서 최윤칠이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1982년 마라톤의 김양곤이 금메달까지 총 11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중요한 사실은 복싱 종목이 1954년 첫 출전한 마닐라 대회에서 박금현의 첫 금메달 이후 1982년 라이트헤비급의 홍기호까지 획득한 금메달이 총 33개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뉴델리에서 금메달 7개를 획득한 이면에는 김승연 대한복싱협회 회장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김 회장 체제 출범 직후 상비군 제도를 실시하고 선수들을 유럽, 남미로 전지훈련을 보냈다. 선수들의 경쟁심 유발을 위해 대표선발전을 통해 대표선수들을 교체했다. 이를 통해 이해정, 문성길, 권현규, 이세 선수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렇게 두터워진 선수층 때문이었을까. 이해정은 1983년 로마 월드컵 선발전에서 홍기호에게, 1984년 LA 올림픽 선발전에서 안달호에게, 1985년 서울월드컵 선발전에서 박시헌 에게 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그런 암울한 기간에도 이해정은 전열을 가다듬었고 2진으로 참가한 1983년 제11회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재기를 노렸다.

1985년말 이해정은 킹스컵 선발전 결승에서 김동운에 판정승을 거두면서 대표팀 컴백에 시동을 걸었다. 이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박시헌과 이성목을 연파하면서 아시안게임 출전권을 획득했다. 당시 복싱과 양궁은 본선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보다 국내선발전을 통과하는 것이 더 힘들 정도로 선수층이 두터웠다. 1986년 5월 미국 네비다주에서 개최된 제4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서 워밍업을 마친 이해정은 그해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1983년 그와 함께 한국체대에 동반 입학한 천재복서 허영모는 선발전에서 문성길에 패해 대표팀에서 탈락한 상황이었다. 이 대회 한국복싱의 예상 금메달은 10개였다. 1982년 개최된 제9회 뉴델리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한 북한이 불참한 것과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7개를 획득한 기록을 참고해 목표를 상향 조정한 것이었다.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팀은 사상 최초로 12체급 전체급에서 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헤비급에 출전한 김유현만 8강전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이라크의 살만 이스마엘에 악전고투 끝에 판정승을 거뒀을 뿐 다른 선수들은 무난하게 결승에 안착했다. 이해정 역시 결승에서 1983년 아시아선수권 우승자 오기하라를 맞이하여 3회 RSC승을 거뒀다. 당시 한국팀은 12체급 전 체급을 석권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대회에서 권현규만 라이트급 결승에서 필리핀의 칸탄치오를 맞아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뒀을 뿐이었다. 12체급 우승자중 이해정은 문성길, 김동길과 함께 대회 2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대회후 이해정은 '공을 이루고 나면 스스로 미련없이 물러난다'는 공수신퇴(攻守身退)란 글의 뜻처럼 박수칠 때 링을 떠났다.
성실한 사회인으로 35년...이후에도 멋진 삶을

그리고 그는 지도자로 변신했다. 1987년 이해정은 당곡중학교 복싱부팀을 맡아 클레버 복서 출신답게 체계적으로 선수들을 조련해 나갔다. 그해 울산에서 개최된 제16회 소년체전에 출전한 제자들중 핀급의 지인진, 밴텀급의 정연수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지인진은 훗날 WBC 페더급 챔피언에 오르는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는 선수로서 국제대회에서 큰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84년 핀란드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때 미국 대표로 참가한 마이크 타이슨이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몸놀림으로 복부 공격을 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복싱도 펜싱 경기처럼 치고빠지는 소극적인 스타일에서 탈피해 익사이팅 하면서 파워풀한 공격을 감행하는 국제적인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당곡 중학교 복싱팀을 학생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시킨 후 이해정은 1989년 지도자 생활을 접고 서울 상계백병원에 취업했다. 그는 35년간 이곳 한곳에만 근무하다 올해 2월 퇴임했다. 퇴임한 이해정은 성실성을 인정받아 상계백병원에서 60세 정년 퇴직자중 최초로 촉탁 근무를 하고 있다. 엘리트 복싱을 지향한 복서들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선례라 할 수 있겠다. 예정된 근무기간 2년을 마치면 고향 보령에 내려가 인생 3막을 펼칠 계획이라고 했다. 성실한 복서에서 성실한 사회인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이해정 팀장의 무궁한 건승을 바란다.


※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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