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WBC 슈퍼플라이급 챔프 조인주 탄생에 얽힌 숨은 비화

25.06.27 6

본문

어느덧 신문사에 칼럼을 연재한 지 10년을 훌쩍 넘겼다. 지난날을 반추해 보면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년을 유급하면서 5년간 야구선수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복싱에 입문해 대학 2학년 때까지 5년간 복싱선수로 활약했다. 말 그대로 정상적인 학교 수업을 받아보지 못한 운동권(?)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필자의 칼럼을 열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이번 주 칼럼을 시작한다.

지난주 필자의 체육관에 국내 최초로 프로복싱 4대 기구(WBA·WBC·WBO·IBF) 국제심판을 역임한 박동안 회장과 동부 ENC 임동술 전무가 방문해 오찬을 함께하면서 담화를 나눴다.

프로복싱 국제심판이란 타이틀보다 70년대 '제2의 패티김'으로 불린 톱가수 이숙 님의 남편으로 이미지가 부각(浮刻)된 박동안 회장은 1949년 해남 출신이다.

유년 시절 청량리에 입성해 잔뼈가 굵은 그는 복싱으로 단련된 스킬과 배짱으로 무장하고 80년대 초반 시나브로 영역을 확보했다. 이곳에서 오락실과 업소를 운영하며 발판을 구축할 때 20대 혈기 왕성한 임동술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박동안 회장은 체중 95kg, 임동술은 130kg을 유지할 정도로 피지컬이 우월했다. 임동술(65세)은 임종수 선생이 작곡한 나훈아의 <고향역>의 배경이 된 익산 태생이다.


임동술 동부 ENC 전무.

학창 시절부터 헤라클레스라 불릴 정도로 근력이 좋았던 임동술은 전북체고 재학시절 촉망받는 레슬러였다. 1979년 제60회 전국체전 레슬링 슈퍼헤비급에 전북대표로 출전해 4강에서 부산 대표 하형주와 한판 승부를 벌여 판정패를 당했지만 실력을 검증받은 선수였다.

1961년 진주태생 하형주는 본래 진주 대아중 시절 씨름선수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부산체고, 동아대를 거치면서 레슬링에서 유도로 전향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영웅으로 떠올랐다.

임동술은 1980년 전북체고 시절 레슬링 종목에서 3관왕을 달성한 뒤 한국체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얼마 뒤 자퇴하고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로 변신해 강남, 천호동, 장안동에서 활동하다 청량리 일대를 장악한 박동안 회장과 인연을 맺어 오늘에 이르렀다.

임동술은 1982년 유도학교(현 용인대)에 입학해 8년 만에 졸업하는 등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낸 열혈남아다. 이 두 사람은 1998년 8월 29일 조인주가 WBC 슈퍼 플라이급 타이틀전을 벌일 때 무대 뒤편에서 타이틀 획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인주를 보유한 풍산 프로모션 이거성 회장은 1951년 익산태생으로 국제대회 3관왕을 차지한 국가대표 출신이다.

이런 전력을 보유한 이거성은 1987년 오광수, 민병용 두 복서를 간판으로 프로모션을 설립해 창립 11년 만에 마침내 최초의 챔피언 탄생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게 됐다.

1998년 8월 29일 리츠칼튼 호텔에서 챔피언 페날로사(필리핀)를 안방으로 불러와 도전자 조인주와 타이틀전을 펼치기로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IMF 사태의 영향으로 스폰서 구하기가 힘들어 난관에 봉착한다. 이때 이거성 회장에게 부족한 대회 경비 8천만 원을 전달한 구세주가 나타난다.


조철제 회장(왼쪽)과 박동안 국제심판이 악수하고 있다.

이분이 바로 박동안 회장이었다. 이 자금은 박 회장이 청량리 일대에서 업소와 오락실을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수익금이었다.

1949년 해남 태생의 박동안 회장에게 청량리는 제2의 고향이다. 이 지역은 대한 복싱협회 전무를 역임한 '원로 주먹 조철제 회장'의 원적지다. 우리나라 육군 참모 총장을 지낸 이진삼 장군이 중위 때 이곳에 근무하면서 조철제 회장과 젊은 시절 추억을 공유한 지역이기도 하다.


조인주(오른쪽)가 페날로사의 얼굴에 펀치를 꽃아넣고 있다.

한편 이 회장이 히든카드로 꺼낸 도전자 조인주는 1968년 전남 담양 출신으로 1992년 4월 프로에 전향해 6년 동안 12전 전승(6KO)을 기록한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이다.

그러나 만 30세의 조인주는 나이가 들어 기량이 급격하게 감퇴하는 에이징 커브(Aging Curve)에 접어들어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26세의 젊은 챔피언 제리 페날로사는 41전 39승(24KO) 1무 1패를 기록한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한국 복서와 14차례 맞붙어 모두 이기며 12KO승을 기록한 한국 복서 킬러였다. 당시 조인주는 1997년과 1998년 각각 한 차례 가뭄에 콩나듯 경기를 치르는 등 긴 공백으로 경기감각이 온전히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 대결에서 조인주가 패한다면 박동안 회장이 투자한 8천만 원은 그대로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이었다.

이에 박동안 회장은 마방렬 트레이너와 함께 설악산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그곳에서 훈련하던 조인주는 갑작스러운 강훈에 그만 과부하(過負荷)가 걸려 발목 부상을 당한다.

그런 극한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한 조인주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훈련을 소화해 낸다. 경기를 앞두고 외국의 심판진이 입국했다. 공항에서 이번 대결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주심 일행을 만나 이들이 향한 곳이 임동술 전무가 강남 모처에서 운영하는 업소였다.

이곳에서 상호 간에 국제심판이라는 동질감으로 바탕으로 격의 없이 담화를 나눈다. 스포츠 세계에서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즉 인탠지블 파워 (Intangibie power)는 팽팽한 경기에서 엄청난 위력를 발휘한다.

예를 들면 축구에서 브라질과 베트남이 대결한다고 가정할 때 전력 편차가 큰 대결에서 심판진의 위력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하지만 상대가 독일이나 아르헨티나, 스페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임동술 전무와 이인동심(二人同心)이 돼 애국심으로 무장한 채 심판진에 지극 정성으로 봉사(?)했다. 드디어 운명의 1998년 8월29일 서울 리츠칼튼 호텔 특설링에서 챔피언 페날로사와 도전자 조인주가 WBC 슈퍼 플라이급 타이틀전을 벌인다.

조인주는 축구선수 출신답게 기민한 발놀림으로 상대의 예봉을 피하면서 팽팽한 접전을 벌인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12회전 동안 조인주의 지능적으로 날리는 카운터 펀치와 챔피언 페날로사의 독일 탱크처럼 밀고 들어오는 강공이 조화를 이루면서 초접전 끝에 경기가 끝난다. 그리고 마침내 감격적인 조인주 의 2ㅡ1 판정승이 선언된다. 누가 말했던가!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고...

풍산프로모션 최초의 세계 챔피언 조인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조인주는 3차 방어전을 일본에서 원정 방어전으로 치른다. 상대는 홈링의 야마구치 게이지였다.

조인주는 현란한 테크닉을 발판으로 한 수 아래의 도전자를 압도하며 12회 판정승을 거두고 롱런 초입에 들어선다. 이때 조인주가 수령한 파이트머니는 원정 경기란 프리미엄이 붙은 파격적인 금액 16만불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이 회장은 박동안 회장에게 투자금 8천만원을 전달한다. 2000년 8월 도꾸야마 마사모리(홍창수)에게 일본 원정 6차방어전에서 패배해 타이틀을 잃은 조인주는 8개월 만에 챔피언을 국내로 불러들여 설욕전을 펼친다.

서울에서 벌어지는 첫 남북 대결 세계 타이틀전이었다. 이때 이거성 회장은 친구인 박동안 회장에게 타이틀전 입장권 3천만원어치를 팔아달라고 주문한다.

이에 박 회장은 일주일 만에 표를 모두 팔아 3천만원을 이 회장에게 전달한다.

이 경기는 조인주의 5회 KO패로 끝나 타이틀 탈환에 실패하면서 은퇴를 한다. 그러나 이거성은 며칠 후 박 회장을 불러 입장권 판매 대금 3천만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폭이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한 이 회장은 냉철한 사업가다. 그런 칼날 같은 성품을 보유한 이 회장도 품격 높은 박동안 회장에게는 따스하게 대했다.




박동안 회장은 지난 1997년 청량리 서울체육관(관장 김경선)을 인수하면서 선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조인주가 바로 이 체육관 출신이란 점이다.

박동안 회장은 새롭게 인수한 체육관을 신도체육관으로 변경시킨 뒤 두 차례 동양 챔피언을 지낸 조용인을 비롯해 국가대표 출신 신동길, 채승석, 이근식을 국내 정상에 올려 놓았다.

현재 구리시 갈매동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이숙 여사와 영욕이 점철된 지난 추억을 뒤로하고 인생 3막을 평온하게 보내고 있는 박동안 회장의 지난 노고에 감사함을 표하면서 이번 주 스포츠 칼럼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