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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복싱 사상 최초의 세계대회 금메달 박기철 하늘에 별이 되다

25.06.1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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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7일(토요일) 필자가 운영하는 체육관에 귀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주인공은 한국체대 4회 졸업생이자 전(前) 인천 대 헌 공고 체육 교사 이창근 선생이었다.



1961년 2월4일 전북 고창태생의 이창근은 그날 강동구 성내동 에 위치한 한국체대 동문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 인천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필자는 이창근과 동행 약속 장소로 떠났다.

현장에서 20명의 한국체대 선 후배들이 목적지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977년 한국체대 1기생부터 1980년까지 4년간 선수들을 지도 감독한 복싱계 페스탈로치라 불리던 박형춘 선생이 자리하고 계셨다.




현장에서 이날 동행한 이창근의 체대 동기인 박기철을 만나 참석 짧은 담화를 나누고 바쁜 일정 때문에 곧바로 체육관으로 복귀하였다. 아뿔사. 그날 짧은 필자와 박기철의 만남이 이별의 전주곡(前奏曲0이 될줄 누가 알았으랴. 그리고 이틀이 지난 6월9일 오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한국체대 5회 졸업생 이성희 선배였다. 1년 선배 박기철이 어제 심장마비로 자택이 있는 구리시에서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悲報)였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해 보니 지난 5월 1일 타계한 이성희의 한국체대 동기 고(故) 신귀항 서울체고 감독이 오버랩(Overlap) 되었다.


제 10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 박기철 경기장면(좌측).

신귀항과 박기철은 둘다 1961년생으로 1976년 10월 서울 운동장 배구장 특설링에서 벌어진 제26회 학생선수권 대회에서 박기철(광주 무등중)은 폴리급에서 신귀항 (서천 장항중)은 페더급에서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은 인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61년 8월 6일 충남 서천 태생의 신귀항은 그 고장에 복싱체육관이 없어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군산체육관 김완수 관장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한 복서다.

신귀항은 이를 발판으로 1977년 인천체고에 복싱 특기생으로 진학한다. 이에 반해 천부적인 자질을 보유한 테크니션 박기철은 그해 전남체고에 진학 졸업반인 1979년 12월 제1회 세계 청소년 대회에 한국 대표(밴텀급)로 출전한다.

그리하여 1회전에서 캐나다의 마이클 니켈, 2회전에서 일본의 우에하라 아키라, 3회전에서 불가리아 파블로프,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마게니아, 를 맞이하여 속사포 같은 스트레이트로 차례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박기철의 금메달은 보통 금메달이 아니었다.

비록 청소년 대회란 딱지가 붙었지만 한국복싱 백년사에 최초의 세계 선수권 이란 공식 타이틀이 걸린 대회에서 걷어 올린 천금 같은 금메달이었다.

그동안 한국 아마복싱은 송순천 정신조 지용주 3명의 복서가 올림픽에서 획득한 3차례 은메달이 최고 성적이었다.

당시 박기철의 전남체고는 성두호 이남의 이현주 김동길 송중석 김종섭 등 7명의 세븐 스타는 역대 학원스포츠 최강의 초호화 멤버를 자랑했다.




1981년 박기철이 한국체대 2학년에 진학했을 때 신귀항은 한국체대 1학년으로 입학한다. 신귀항이 인천체고를 자퇴한 후 서울체고에 재입학하면서 발생한 헤프닝이었다.

그해 5월 박기철은 김명복 배 페더급 결승에서 국제대회 3관왕 고희용과 격돌한다. 그러나 2회에 회심의 일격을 날린 고희룡의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에 박기철은 녹다운을 당한다.

3회 필사적인 반격을 가한 박기철은 진땀 흘린 판정승을 거둔다. 당시 한국 아마복싱은 남산 위에 소나무가 철갑을 겹겹이 두른 듯이 선수층이 매우 두터웠다.

대학 3학년에 진학한 1982년 박기철은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제10회 아시아 선수권 제1회 뉴질랜드 국제대회를 비롯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 박기철은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예선부터 3연승을 거두면서 결승에 진출한 박기철의 상대는 북한의 여연식이었다. 이때 그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라이트 웰터급 결승전에 진출한 그의 막내 삼촌 박태식이 대회 결승에서 북한의 노용수에게 판정패한 악몽이 떠올랐다고 박기철은 회고했다. 결국 박기철은 결승에서 판정패 삼촌(박태식)과 같이 은메달에 머문다.




박기철의 삼촌인 박태식은 1975년 킹스컵대회에서 우승과 함께 대회 최우수 복서로 (MVP)로 선정되었고 1976년 킹스컵대회 2연패를 달성하면서 그해 몬트리올 올림픽에도 출전한 국가대표 간판 복서였다.

박기철은 1984년 LA 올림픽에 마지막 승부구를 던진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고향 광주에 내려와 훈련하던 어느날 이재화 감독이 박기철이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슬리퍼로 뺨을 때렸던 모양이다.

선수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자 발끈한 박기철은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대로 곧바로 복싱을 접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안타깝게 23살의 젊은 나이에 10년간의 선수 생활을 청산하고 말았다.

박기철을 은퇴로 몰고 간 필자와 친분이 두터웠던 수년전 타계한 복싱협회 심판위원을 지낸 이재화 선생이 오늘따라 왠지 그리워진다.

이분도 화통한 성품이라 생전에 필자와 교감을 많이 나눈 분이었다. 필자와 박기철은 한달전 한국체대 동기이자 태권도 학과 장권 한체대 교수와 성내동 에 위치한 체육관 근처 음식점에서 우연히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새롭다.

1961년 강화도 출신의 한국체대 4회 졸업생 장권 교수도 필자가 서울체고 신귀항 감독의 러브콜로 서울체고에 입성했을 때 인연을 맺은 분이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체고에 5년간 근무하면서 필자는 전국대회에서 종합준우승 1회 종합 3위 3차례를 이룩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재임 기간 중 한국체대에 7명의 서울 체고 선수들을 입학시켰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1998년 학생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이옥성(경남체고)를 16ㅡ11로 제압하고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한 서울체고 국나남이 그해 개최된 제79회 (제주도) 전국체전 코크급 준결승에서 김기석(경북체고)에 패한다.

결국 성적 부진으로 신귀항 감독에 의해 코치직에서 퇴출(退出) 위기까지 몰렸던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용광로보다 더 뜨겁게 울분과 분노가 가슴속 깊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1999년이 시작되었다. 서울체고 에이스 국나남이 대통령배 준결승전에서 1997년 대통령배 최우수복서 대전 대표 정헌범을 결승에서 강원대표 홍무원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해 10월 전국체전에서 국나남은 준결에서 홍무원을 결승에서 전북 대표 박현철을 꺾고 화룡정점 (畵龍點睛)의 대미를 장식 한국체대에 진학한다, 필자는 그해 서울복싱협회에서 이청하 서울시청 감독과 함께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였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고 코치는 잘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속설이 실감 나는 장면이었다.



이제 고인이 된 두 사람의 지난날의 성품을 되돌아 회상해 보면 한편 우선 신귀항은 매우 섬세하면서 신중한 헴릿형이었다. 반면 박기철은 화가 나면 거침없이 품어대는 돈키호테형이었다.

박기철의 장점은 가식이 없고 담백한 반면 신귀항은 자기관리를 잘하는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다시 한번 한 달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하늘에 별이된 신귀항 박기철 두 선배 죽음을 애도하면서 오늘따라 프랑스 작가 빅토로 위고의 어록 한 줄이 강하게 떠오른다.

어제는 싸우는 것이고 오늘은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모두가 죽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