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청 창단 감독이자 아시안게임 금메달 권현규의 복싱 스토리
25.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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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조영섭의 스포츠 칼럼
성웅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27일 '2025 종별선수권' 결
승전이 열린 충남 청양에서 귀한 분을 만났다
.
그 주인공은 1962년 11월 전남 목포 생으로 현 목포시청 감독을 맡고 있는 권현규였다.
그는 전형적인 순박함, 담담한 표정, 그리고 과묵한 행동까지 예나 지금이
나 변한게 없다. 권 감독을 곁에 있는 국가대표 출신 박스 멀티 스포츠
권은상 대표(한국체대)와 홍성민 SM 대표에게 소개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번 대회에서 목포시청은 65Kg급 김동은, 60 Kg급 고성훈 두 선수가 출전
했다. 고성훈 선수가 창단 2년 만에 가뭄 속 단비 같은 첫 금메달을 획득해 감격의 주인공이 됐다.
목포시청 창단의 산파(産婆)역을 맡은 인물은 현 목포시 복싱협회 주항선 회장이다. 1958년 목포 태생의 주항선은 1977년 제58회 전국체전 라이트
웰터급 결승에서 전북 대표 강월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금메달은 목포시 탄생 이후 상징적인 첫 전국체전 금메달이었다.
주항선 회장은 1980년 8월 제10회 대통령배 결승에서 제10회 아시아선수
권 금메달 김현호를 5-0 판정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태극마크를 달
았다.
그후 1981년 태국 킹스컵과 필리핀 마르코스 배에 국가대표로 출전, 동메
달을 획득해 국위를 선양했다. 한편 이번 주 스포츠 칼럼 주인공 권현규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재학시절 육상에 천부적인 재질을
보유한 펀더멘탈이 탄탄한 복서였다.
1978년 권현규는 사학의 명문 문태고에 입학해, 신한 체육관
최진태 관장의 지도로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혼합된 완벽한 복서로
재탄생한다.
문태고 2학년 때인 1979년 한 템포 빠른 반사신경으로 상대를 압도하며
학원 스포츠를 평정한다.
그해 12월 권현규는 모스크바 올림픽 2차 선발전(밴텀급) 결승에서 임창용
(상주고)을 꺾고 올라온 1975년 아시아선수권 우승자 한창덕을 꺾고 우승
을 차지하면서 성인 무대를 접수한다.
한창덕의 선친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메달리스트인 한수안 선생이다.
1980년 1월 모스크바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 진출한 권현규의 상대는 1977
년 대한 복싱협회 최우수선수이자 1979년 3개 대회 국제무대를 평정하면
서 2개 대회 연속 최우수 선수상 (MVP) 을 수상한 아마복싱의 간판 황철순
이었다.
고교생 권현규는 8년 대선배 황철순과 맞대결에서 주도권을 잡고 포인트
에서 앞서 나갔다. 그러나 결과는 황철순의 판정승이 선언된다.
현장에서 경기를 가장 유심히 지켜보며 관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앞선
밴텀급 준결승에서 지택림(한국체대)을 판정으로 꺾고 결승에 선착한 박기
철(전남체고)이었다.
박기철은 필자에게 그 경기의 실체는 황철순의 화려한 테크닉을 무용지물
(無用之物)로 만들면서 주도권을 잡은 권현규의 판정승이라고 말했다
.
당시 80년 1월 동아일보 기사에 <황철순 고전 끝에 판정승>이라고 1면에 실렸을 정도로 권현규는 선전했다.
그해 10월 권현규는 제61회 전국체전 우승을 비롯 대통령배 3연패를 달성
해 건재를 과시한다. 1981년 목포대학에 진학한 권현규는 제1회 한일 국가
대항전 우승에 이어 제5회 김명복 박사배 밴텀급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권현규의 스파링 전문파트너가 목포 신안체육관 1년 후배 문성길(덕
인고)이었다. 문성길의 회고에 의하면 권현규와 스파링을 할 때마다 압도
적인 기량 차이로 인해 자신은 인간 샌드백이 되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
아 스파링을 마치면 얼굴은 퉁퉁붓고 코피가 터져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그러진 몰골을 하고 귀가한 아들 문성길의 모습을 지켜본 그의
부친이 "야, 이놈아 얼굴도 못생긴 네가 권투까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
다. 차라리 복싱 그만두고 깡패나 되라"고 푸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82뉴델리 아시안게임 권현규 (오른쪽)경기장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라이트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권현규는
1983년, 1985년 2차례에 걸쳐 국내 복싱 라이트급을 평정하고 월드컵
대회 본선에 출전한다.
권현규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출전 라이트급 결승에서 태국의 퐁수
리를 1회 KO로 잡고 올라온 아시아선수권 최우 수복서이자 세계 선수권
준우승자 필리핀의 칸탄치오를 5ㅡ0 판정으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따냈다.
권현규는 1987년 아시아선수권 준우승을 끝으로 6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오래전 목포대학 최진태 감독은 필자와 담화에서 팀 에이스 전칠성
(목포대)이 김기택에 3연패(2KO)를 당하는등 치욕적인 5연패를 당해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런 김기택에 당한 악몽의 연패 사슬을 끊으면서 스승의 자존감을 회복
시켜준 복서가 바로 권현규다.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으면서 박수를 받고
링을 떠난 권현규는 1989년 조선대학교 교육 대학원을 졸업한다.
이를 전환점으로 목포 덕인중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권현규는 3년 전 정
년퇴임하고 주항선 회장의 주도적 역할로 2년전 목포시청 감독을 맡아 창단 2년 만에 첫 금메달 리스트를 탄생시켰다.
이 금메달을 시작으로 주항선 회장과 조화를 이뤄 목포 복싱이 과거 화려한 옛 영화를 부활시키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성웅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27일 '2025 종별선수권' 결
승전이 열린 충남 청양에서 귀한 분을 만났다
.
그 주인공은 1962년 11월 전남 목포 생으로 현 목포시청 감독을 맡고 있는 권현규였다.
그는 전형적인 순박함, 담담한 표정, 그리고 과묵한 행동까지 예나 지금이
나 변한게 없다. 권 감독을 곁에 있는 국가대표 출신 박스 멀티 스포츠
권은상 대표(한국체대)와 홍성민 SM 대표에게 소개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이번 대회에서 목포시청은 65Kg급 김동은, 60 Kg급 고성훈 두 선수가 출전
했다. 고성훈 선수가 창단 2년 만에 가뭄 속 단비 같은 첫 금메달을 획득해 감격의 주인공이 됐다.
목포시청 창단의 산파(産婆)역을 맡은 인물은 현 목포시 복싱협회 주항선 회장이다. 1958년 목포 태생의 주항선은 1977년 제58회 전국체전 라이트
웰터급 결승에서 전북 대표 강월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금메달은 목포시 탄생 이후 상징적인 첫 전국체전 금메달이었다.
주항선 회장은 1980년 8월 제10회 대통령배 결승에서 제10회 아시아선수
권 금메달 김현호를 5-0 판정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태극마크를 달
았다.
그후 1981년 태국 킹스컵과 필리핀 마르코스 배에 국가대표로 출전, 동메
달을 획득해 국위를 선양했다. 한편 이번 주 스포츠 칼럼 주인공 권현규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재학시절 육상에 천부적인 재질을
보유한 펀더멘탈이 탄탄한 복서였다.
1978년 권현규는 사학의 명문 문태고에 입학해, 신한 체육관
최진태 관장의 지도로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혼합된 완벽한 복서로
재탄생한다.
문태고 2학년 때인 1979년 한 템포 빠른 반사신경으로 상대를 압도하며
학원 스포츠를 평정한다.
그해 12월 권현규는 모스크바 올림픽 2차 선발전(밴텀급) 결승에서 임창용
(상주고)을 꺾고 올라온 1975년 아시아선수권 우승자 한창덕을 꺾고 우승
을 차지하면서 성인 무대를 접수한다.
한창덕의 선친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메달리스트인 한수안 선생이다.
1980년 1월 모스크바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 진출한 권현규의 상대는 1977
년 대한 복싱협회 최우수선수이자 1979년 3개 대회 국제무대를 평정하면
서 2개 대회 연속 최우수 선수상 (MVP) 을 수상한 아마복싱의 간판 황철순
이었다.
고교생 권현규는 8년 대선배 황철순과 맞대결에서 주도권을 잡고 포인트
에서 앞서 나갔다. 그러나 결과는 황철순의 판정승이 선언된다.
현장에서 경기를 가장 유심히 지켜보며 관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앞선
밴텀급 준결승에서 지택림(한국체대)을 판정으로 꺾고 결승에 선착한 박기
철(전남체고)이었다.
박기철은 필자에게 그 경기의 실체는 황철순의 화려한 테크닉을 무용지물
(無用之物)로 만들면서 주도권을 잡은 권현규의 판정승이라고 말했다
.
당시 80년 1월 동아일보 기사에 <황철순 고전 끝에 판정승>이라고 1면에 실렸을 정도로 권현규는 선전했다.
그해 10월 권현규는 제61회 전국체전 우승을 비롯 대통령배 3연패를 달성
해 건재를 과시한다. 1981년 목포대학에 진학한 권현규는 제1회 한일 국가
대항전 우승에 이어 제5회 김명복 박사배 밴텀급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권현규의 스파링 전문파트너가 목포 신안체육관 1년 후배 문성길(덕
인고)이었다. 문성길의 회고에 의하면 권현규와 스파링을 할 때마다 압도
적인 기량 차이로 인해 자신은 인간 샌드백이 되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
아 스파링을 마치면 얼굴은 퉁퉁붓고 코피가 터져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그러진 몰골을 하고 귀가한 아들 문성길의 모습을 지켜본 그의
부친이 "야, 이놈아 얼굴도 못생긴 네가 권투까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
다. 차라리 복싱 그만두고 깡패나 되라"고 푸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82뉴델리 아시안게임 권현규 (오른쪽)경기장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라이트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권현규는
1983년, 1985년 2차례에 걸쳐 국내 복싱 라이트급을 평정하고 월드컵
대회 본선에 출전한다.
권현규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출전 라이트급 결승에서 태국의 퐁수
리를 1회 KO로 잡고 올라온 아시아선수권 최우 수복서이자 세계 선수권
준우승자 필리핀의 칸탄치오를 5ㅡ0 판정으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따냈다.
권현규는 1987년 아시아선수권 준우승을 끝으로 6년간의 국가대표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오래전 목포대학 최진태 감독은 필자와 담화에서 팀 에이스 전칠성
(목포대)이 김기택에 3연패(2KO)를 당하는등 치욕적인 5연패를 당해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런 김기택에 당한 악몽의 연패 사슬을 끊으면서 스승의 자존감을 회복
시켜준 복서가 바로 권현규다.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으면서 박수를 받고
링을 떠난 권현규는 1989년 조선대학교 교육 대학원을 졸업한다.
이를 전환점으로 목포 덕인중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권현규는 3년 전 정
년퇴임하고 주항선 회장의 주도적 역할로 2년전 목포시청 감독을 맡아 창단 2년 만에 첫 금메달 리스트를 탄생시켰다.
이 금메달을 시작으로 주항선 회장과 조화를 이뤄 목포 복싱이 과거 화려한 옛 영화를 부활시키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