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천 교수가 창립한 용복회 모임에서 만난 복서들
2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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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복싱 밴텀급에서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송순천 교수가 창립한 용복회(용인대 복싱 동문회) 10대 회장 취임식이 지난 15일 용인시 기흥구에 위치한 호텔 엘로라에서 열렸다.
이날 취임식 연락을 받고 목동에서 국민대학 이정호 교수, 홍성민 SM 대표와 동행해 현장에 도착했다.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필자가 돌고 돌아 다다른 용인대학 입학은 내 삶의 분수령이 되었다.
1983년 7월 로마 월드컵 2차 선발전 결승에서 킹스컵·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권채오(한국화약)를 판정으로 꺾고 우승한 필자는 당시 군산대학 진학이 예정돼 있었다.
그 무렵 원광대 오학수 교수가 조석인 원광대 감독의 가교(架橋)역할로 전국체전 훈련장에 나타나 필자에게 스카우트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 와중에 그해 인천에서 열린 제64회 전국체전 현장에 혜성처럼 나타난 심영자 회장에 의해 김의진, 황동용과 함께 중간에 인터셉트 당하면서(?) 상경해 결국 운명처럼 용인대학에 입학 오늘에 이르렀다.
이정호 국민대 총괄 교수.
한편, 이번 취임식에 필자와 동행한 용인대학 89학번인 이정호 국민대학 총괄교수는 지난 2024년 4월 국민대학 종합복지관에서 복싱부를 전격 창단해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국민대학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지용주 선수의 모교다.
당시 지용주는 국민대학 법학과 2년생으로 올림픽에 참가해 천금 같은 메달을 따냈다.
앞으로 새롭게 창단한 국민대학 복싱부가 별똥별처럼 잠깐 빛을 내다가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은하수처럼 빛나고 반짝이는 존재감 있는 팀으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누군가의 말처럼 권력을 가졌을 때의 태도가 진짜 인격이라는 의미처럼 항상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상대를 대해주는 이정호 교수가 창단한 국민대학의 번창을 바란다.
현장에 도착해 회장에 취임한 김영관 ㈜금보 홀딩스 대표를 만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면서 취임 소감을 들었다.
1999년 송순천 교수가 창립해 발족한 용복회는 올해로 4반세기를 맞이했다. 이날 취임한 김 회장은 복싱 발전과 화합에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역설했다.
홍성민 대표(왼쪽부터), 이한영 자문위원, 장상봉 본부장, 김준홍 관장.
그는 우선적 으로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2억 정도의 기금을 조성해 모교인 용인대학 복싱훈련단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잠시 후 김영관 회장이 사회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은 탤런트 임혁 선생을 비롯, ㈜트레시스 경기지역본부장 장상봉, (사)대한 보디빌딩 협회 이한영 자문위원이 외부 초청 인사로 등장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세 분은 필자와 평소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간접으로 연결된 지인이었다. 이날 용인대 84학번 동기인 김진표 현 용인대 교수와 모처럼 해후해 담화를 나누었다.
1964년 8월 9일 강원도 강릉태생의 김진표는 1984년 제34회 전국 선수권 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 장원철(목포대)에게 결승전에서 3ㅡ2로 판정패해 준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각종 선발전에서 8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김남덕(동아대), 88년 제39회 세계 군인선수권(카이로) 금메달 성광배(한국체대), 86년 전국체전 금메달 신주섭(대구대), 두 체급 동양 챔피언 고인식(원광대) 등 정상급 복서들과의 대결에서 간발의 차로 져 우승 문턱에서 탈락한다.
이어 대학 졸업반인 1987년 2월 88 서울 올림픽 파견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83년 로마 월드컵 금메달리스트 김광선과 맞대결한다.
김진표는 1회 회심의 라이트 일격을 명중시켰고 이에 김광선은 큰 충격을 받고 다운을 당한다. 그 뒤 김광선은 비틀거리면서 KO 일보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공이 울린다.
그런 페이스로 3회전이 끝났을 때 어느 누구도 김진표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김진표의 판정패였다. 순간 분노가 수직 상승한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시 이 경기는 <김광선 가까스로 판정승>이라는 타이틀로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당시 세컨을 보았던 고(故) 조종득 용인대 복싱 전문 강사는 훗날 필자에게 사실상 그 경기는 김진표의 1회 RSC승이라고 회고했다.
김진표는 이렇게 수차례 다소 억울한 패배를 딛고 이후 용인대학 교수로 임명된다. 그가 지도한 용인대학은 지난해 청양에서 개최된 2024 회장배대회와 전국 우승권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전대회 우승팀) 으로 대학부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김 교수는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그는 재임 기간 중 35차례 이상 각종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일궈내면서 변방에 위치한 용인대학 복싱부를 국내 정상권에 올려놓았다. “3등은 괜찮다. 그러나 3류는 안된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문임철, 이승배 등이 출전해, 이 중 이승배가 라이트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취임식에서는 용인대학 창설 후 최초로 1987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오세한의 모습도 보였다. 오세한은 동양 챔피언 정상일을 비롯해 박광천, 송경섭, 김원한, 이충섭 등을 배출한 청주 동양체육관(관장 정재룡) 소속이었다. 1984년 9월 청주농고 졸업반 시절 제5회 회장배 대회에 출전해 라이트 미들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이듬해 용인대학에 진학했다. 오세한은 1987년 8월 88서울올림픽 3차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대표로 발탁돼 1988년 제1회 서울컵, 1989년 한미 국가 대항전 등 5차례에 걸쳐 국제대회를 경험한다.
특히 88서울올림픽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박시헌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판정패를 당한다. 결국 복싱협회는 불복 판정이 일어난 박시헌과 오세한 경기를 포함해 4체급에 걸쳐 재경기를 치른다.
역사적 사건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듯 4각의 링에 포진된 심판진도 익사이팅한 팽팽한 경기는 보는 각도에 따라 판정이 달라질 수 있다. 마치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느냐 아랍인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
한편 페더급에서 박윤섭과 재경기를 펼친 끝에 우승한 이재혁은 올림픽 본선 1차전에서 뒷날 WBC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멕시코의 미구엘 곤잘레스를, 3차전에선 90년 세계선수권자 불가리아의 키리키로프를 판정으로 물리치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라이트 미들급의 오세한은 박시헌의 빠른 발을 잡지 못하고 2차전 역시 판정패를 당했다. 박시헌은 막차로 본선에 진출해 올림픽에서 감격적인 금메달을 획득한다.
당시 양궁과 함께 복싱 종목의 치열한 국내 선발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용인대학 오종서는 대천고 재학 시절 대전체고 한정훈, 청운실고 장수곤과 물고 물리는 접전을 펼치면서 삼각편대를 형성한 경량급의 강타자였다.
대학 1학년 때 벌어진 아시아 청소년 선발전에서 3연승(1KO)으로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오종서는 본선(일본)에서 4전 전승(3KO)으로 최우수선수상(MVP)을 받았다.
1983년 4월 광주에서 개최된 대통령배 선발전에서 충남 대표로 출전한 오종서는 밴텀급 준결승전에서 전남 대표 문성길과 용호상박 난형난제의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가 3ㅡ 2로 판정패를 당한다.
경기 후 라커룸에서 글러브를 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던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난다. 이날 취임식 현장에서 1990년 12월 제2회 마닐라 컵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한 김왕순 대전체육회 차장도 모습을 보였다.
1969년 6월 대전 출신의 김왕순은 대전체고·용인대학 출신으로 이후 지도자로 변신 화려한 성적을 창출한다.
그는 한 동작을 3만5천번씩 반복적으로 연습을 하면 그 동작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는 <불수의적 동작>을 선수들에게 반복적으로 학습시켜 종합우승을 8차례 일궈낸 명장 중의 명장이다.
특히 소년체전에서 12차례 금메달을 획득해 이 부문 2위인 박봉관을 2개 차로 따돌리면서 소년체전 최다금메달 1위를 획득한 지도자로 명성을 높였다.
1974년 여수태생의 김준홍은 아리랑 공구 이형수 관장의 지도로 복싱에 입문했다. 1992년 서울 신인 플라이급 우승을 한 후 그해 7월 벌어진 서울시 회장배 대회마저 우승을 차지하면서 7연승을 질주한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이형수 관장에 의해 94년 12월 20살 나이에 프로에 데뷔한 그는 1995년 제25회 MBC 주최 제25회 전국 신인왕(페더급)전에 출전해 3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김호진과 접전 끝에 6회 판정패해 준우승에 머문다.
통산 11전 7승(4KO) 4패를 끝으로 복싱을 접은 유망주 김준홍은 용인대 92학번 동기인 홍성민 SM 대표와 절친으로 현재 중계동에서 허리케인 복싱체육관을 건실하게 운영하는 관장이기도 하다. 끝으로 제10대 용복회 회장에 취임한 온화하고 합리젹인 성품의 김영관 ㈜금보 홀딩스 대표의 무궁한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
글쓴이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이날 취임식 연락을 받고 목동에서 국민대학 이정호 교수, 홍성민 SM 대표와 동행해 현장에 도착했다.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필자가 돌고 돌아 다다른 용인대학 입학은 내 삶의 분수령이 되었다.
1983년 7월 로마 월드컵 2차 선발전 결승에서 킹스컵·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권채오(한국화약)를 판정으로 꺾고 우승한 필자는 당시 군산대학 진학이 예정돼 있었다.
그 무렵 원광대 오학수 교수가 조석인 원광대 감독의 가교(架橋)역할로 전국체전 훈련장에 나타나 필자에게 스카우트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 와중에 그해 인천에서 열린 제64회 전국체전 현장에 혜성처럼 나타난 심영자 회장에 의해 김의진, 황동용과 함께 중간에 인터셉트 당하면서(?) 상경해 결국 운명처럼 용인대학에 입학 오늘에 이르렀다.
이정호 국민대 총괄 교수.
한편, 이번 취임식에 필자와 동행한 용인대학 89학번인 이정호 국민대학 총괄교수는 지난 2024년 4월 국민대학 종합복지관에서 복싱부를 전격 창단해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국민대학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지용주 선수의 모교다.
당시 지용주는 국민대학 법학과 2년생으로 올림픽에 참가해 천금 같은 메달을 따냈다.
앞으로 새롭게 창단한 국민대학 복싱부가 별똥별처럼 잠깐 빛을 내다가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은하수처럼 빛나고 반짝이는 존재감 있는 팀으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누군가의 말처럼 권력을 가졌을 때의 태도가 진짜 인격이라는 의미처럼 항상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상대를 대해주는 이정호 교수가 창단한 국민대학의 번창을 바란다.
현장에 도착해 회장에 취임한 김영관 ㈜금보 홀딩스 대표를 만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면서 취임 소감을 들었다.
1999년 송순천 교수가 창립해 발족한 용복회는 올해로 4반세기를 맞이했다. 이날 취임한 김 회장은 복싱 발전과 화합에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역설했다.
홍성민 대표(왼쪽부터), 이한영 자문위원, 장상봉 본부장, 김준홍 관장.
그는 우선적 으로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2억 정도의 기금을 조성해 모교인 용인대학 복싱훈련단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잠시 후 김영관 회장이 사회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은 탤런트 임혁 선생을 비롯, ㈜트레시스 경기지역본부장 장상봉, (사)대한 보디빌딩 협회 이한영 자문위원이 외부 초청 인사로 등장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세 분은 필자와 평소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간접으로 연결된 지인이었다. 이날 용인대 84학번 동기인 김진표 현 용인대 교수와 모처럼 해후해 담화를 나누었다.
1964년 8월 9일 강원도 강릉태생의 김진표는 1984년 제34회 전국 선수권 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 장원철(목포대)에게 결승전에서 3ㅡ2로 판정패해 준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각종 선발전에서 8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김남덕(동아대), 88년 제39회 세계 군인선수권(카이로) 금메달 성광배(한국체대), 86년 전국체전 금메달 신주섭(대구대), 두 체급 동양 챔피언 고인식(원광대) 등 정상급 복서들과의 대결에서 간발의 차로 져 우승 문턱에서 탈락한다.
이어 대학 졸업반인 1987년 2월 88 서울 올림픽 파견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83년 로마 월드컵 금메달리스트 김광선과 맞대결한다.
김진표는 1회 회심의 라이트 일격을 명중시켰고 이에 김광선은 큰 충격을 받고 다운을 당한다. 그 뒤 김광선은 비틀거리면서 KO 일보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공이 울린다.
그런 페이스로 3회전이 끝났을 때 어느 누구도 김진표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김진표의 판정패였다. 순간 분노가 수직 상승한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시 이 경기는 <김광선 가까스로 판정승>이라는 타이틀로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당시 세컨을 보았던 고(故) 조종득 용인대 복싱 전문 강사는 훗날 필자에게 사실상 그 경기는 김진표의 1회 RSC승이라고 회고했다.
김진표는 이렇게 수차례 다소 억울한 패배를 딛고 이후 용인대학 교수로 임명된다. 그가 지도한 용인대학은 지난해 청양에서 개최된 2024 회장배대회와 전국 우승권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전대회 우승팀) 으로 대학부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김 교수는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그는 재임 기간 중 35차례 이상 각종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일궈내면서 변방에 위치한 용인대학 복싱부를 국내 정상권에 올려놓았다. “3등은 괜찮다. 그러나 3류는 안된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문임철, 이승배 등이 출전해, 이 중 이승배가 라이트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취임식에서는 용인대학 창설 후 최초로 1987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오세한의 모습도 보였다. 오세한은 동양 챔피언 정상일을 비롯해 박광천, 송경섭, 김원한, 이충섭 등을 배출한 청주 동양체육관(관장 정재룡) 소속이었다. 1984년 9월 청주농고 졸업반 시절 제5회 회장배 대회에 출전해 라이트 미들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이듬해 용인대학에 진학했다. 오세한은 1987년 8월 88서울올림픽 3차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대표로 발탁돼 1988년 제1회 서울컵, 1989년 한미 국가 대항전 등 5차례에 걸쳐 국제대회를 경험한다.
특히 88서울올림픽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박시헌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판정패를 당한다. 결국 복싱협회는 불복 판정이 일어난 박시헌과 오세한 경기를 포함해 4체급에 걸쳐 재경기를 치른다.
역사적 사건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듯 4각의 링에 포진된 심판진도 익사이팅한 팽팽한 경기는 보는 각도에 따라 판정이 달라질 수 있다. 마치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느냐 아랍인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
한편 페더급에서 박윤섭과 재경기를 펼친 끝에 우승한 이재혁은 올림픽 본선 1차전에서 뒷날 WBC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멕시코의 미구엘 곤잘레스를, 3차전에선 90년 세계선수권자 불가리아의 키리키로프를 판정으로 물리치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라이트 미들급의 오세한은 박시헌의 빠른 발을 잡지 못하고 2차전 역시 판정패를 당했다. 박시헌은 막차로 본선에 진출해 올림픽에서 감격적인 금메달을 획득한다.
당시 양궁과 함께 복싱 종목의 치열한 국내 선발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용인대학 오종서는 대천고 재학 시절 대전체고 한정훈, 청운실고 장수곤과 물고 물리는 접전을 펼치면서 삼각편대를 형성한 경량급의 강타자였다.
대학 1학년 때 벌어진 아시아 청소년 선발전에서 3연승(1KO)으로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오종서는 본선(일본)에서 4전 전승(3KO)으로 최우수선수상(MVP)을 받았다.
1983년 4월 광주에서 개최된 대통령배 선발전에서 충남 대표로 출전한 오종서는 밴텀급 준결승전에서 전남 대표 문성길과 용호상박 난형난제의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가 3ㅡ 2로 판정패를 당한다.
경기 후 라커룸에서 글러브를 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던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난다. 이날 취임식 현장에서 1990년 12월 제2회 마닐라 컵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한 김왕순 대전체육회 차장도 모습을 보였다.
1969년 6월 대전 출신의 김왕순은 대전체고·용인대학 출신으로 이후 지도자로 변신 화려한 성적을 창출한다.
그는 한 동작을 3만5천번씩 반복적으로 연습을 하면 그 동작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는 <불수의적 동작>을 선수들에게 반복적으로 학습시켜 종합우승을 8차례 일궈낸 명장 중의 명장이다.
특히 소년체전에서 12차례 금메달을 획득해 이 부문 2위인 박봉관을 2개 차로 따돌리면서 소년체전 최다금메달 1위를 획득한 지도자로 명성을 높였다.
1974년 여수태생의 김준홍은 아리랑 공구 이형수 관장의 지도로 복싱에 입문했다. 1992년 서울 신인 플라이급 우승을 한 후 그해 7월 벌어진 서울시 회장배 대회마저 우승을 차지하면서 7연승을 질주한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이형수 관장에 의해 94년 12월 20살 나이에 프로에 데뷔한 그는 1995년 제25회 MBC 주최 제25회 전국 신인왕(페더급)전에 출전해 3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김호진과 접전 끝에 6회 판정패해 준우승에 머문다.
통산 11전 7승(4KO) 4패를 끝으로 복싱을 접은 유망주 김준홍은 용인대 92학번 동기인 홍성민 SM 대표와 절친으로 현재 중계동에서 허리케인 복싱체육관을 건실하게 운영하는 관장이기도 하다. 끝으로 제10대 용복회 회장에 취임한 온화하고 합리젹인 성품의 김영관 ㈜금보 홀딩스 대표의 무궁한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
글쓴이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