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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복싱 외길 걷는 프로복싱 4대 챔피언 염동균

26.09.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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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8월1일 비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WBC가 슈퍼 밴텀급을 신설하면서 동양 무대를 평정한 염동균에게 세계 타이틀전을 펼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WBC 동급 챔피언은 36전 23승(12KO) 4무9패를 기록한 리야스코(파나마). 공교롭게도 1976년 8월1일 그날 오전 10시에는 레슬링 자유형 62Kg 종목에서 양정모(조폐공사)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뜻깊은 날이었다.

고교야구로 눈을 돌리면 프로 야구 홈런왕 이승엽이 탄생한 해인 1976년 고교야구는 최동원(경남고)·김시진(대구 상고)·김용남(군산상고)·선우대영(서울고)·김정수(신일고)·이윤섭·노상수(부산상고)·인호봉(인천고) 등 초 고교급 대형투수들이 군웅할거(群雄割據)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펼친 해였다.

역사적인 이날 염동균은 대전료 4천만원을 지급한 리야스코와 대결에서 전 라운드에 걸쳐 주도권을 잡고 챔피언을 맹공했다.

특히 3회와 7·8회엔 염동균의 공세에 쳄피언 리아스코는 비틀거리면서 수세에 급급했다. 그렇게 15회전 경기가 끝나고 삼척동자(三尺童子)가 채점해도 무난한 염동균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라고 주심 로자딜라(미국)가 리아스코의 판정승을 선언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판정은 번복되지 않으면서 염동균은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만일 염동균이 세계 정상에 올랐다면 8월1 일은 올림픽 금메달과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이 동시에 탄생한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염동균은 1950년 11월 충북 옥천 태생이다. 옥천은 사육신으로 추대받은 백촌 김문기를 비롯해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의 영웅 중봉 조헌, 조선 효종때 북벌론을 주창한 우암 송시열, 현대 시의 거봉(巨峯)이자 이동원 박인수가 부른 향수(鄕愁)의 주인공 정지용,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탄생지다.

또한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관산성으로 불린 옥천은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맞붙어 죽임을 당한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동양 챔피언에 오를 당시 염동균.

이곳 옥천에서 5살 때 대전으로 이주한 염동균은 1968년 충남공고 2학년 때 호남선수권, 1969년 제23회 전국 선수권과 50회 전국체전 등 3차례 경기에서 결승(밴텀급)에 올랐다.

하지만 이거성·백종우·최재호에게 차례로 패하면서 은메달 3개를 획득한다. 염동균은 1970년 충북대에 특기생으로 진학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이를 포기하고 그해 3월 프로로 전향한다. 1971년 10월 국내 J. 페더급 정상에 오른 염동균은 타이틀 14차 방어에 성공한다.

1974년 3월 동양 J. 페더급 챔피언 장규철의 7차방어전 상대로 내정돼 판정승을 거두고 동양 무대를 석권한다.

동양 타이틀을 5차 방어에 성공한 염동균은 1976년 8월1일 WBC 슈퍼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리야스코(파나마)에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판정패를 당한다.


프로복싱 4대 챔피언에 오른 염동균.

1976년 11월24일 염동균은 리아스코를 KO 시킨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 로얄 로바야시(일본)를 서울로 불러들여 타이틀에 도전한다.

일본 심판이 2명이나 포진된 이 경기에서 염동균은 로바야시를 1회 한차례 다운시키면서 2ㅡ0 판정승을 거둔다. 일본 심판 모리다 겐이 146대 144로 염동균의 승리로 채점해, 염동균은 김기수·홍수환·유제두에 이어 국내에서 4번째로 세계 챔피언에 오를수 있었다.

1977년 2월 콜롬비아 최초의 세계 챔피언 안토니오 세르반테스의 친동생 호세 세르반테스를 상대로 염동균은 1차방어전을 갖는다.

WBA 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멕시코의 루벤 올리바레스를 6회 KO 시킨 만만치 않은 도전자 호세 세르반테스와 경기에서 15회 판정승을 거둔다.

염동균은 1977년 5월21일 16연속 KO승을 기록한 웰프레도 고메스(푸에르 토리코)를 상대로 원정 2차방어전을 펼친다.

이 대결에서 염동균은 1회 선제 다운을 탈취한 후 필살의 라이트훅을 고메즈에게 날렸다.

하지만 그만 엄지손가락이 부러지는 낭패를 맛본다.

결국 12회 체력이 고갈된 염동균은 고메즈에게 KO패로 타이틀을 상실한다. 염동균은 경기가 종료된 후 글러브를 벗을 때 손이 퉁퉁 부어 잘 빠지지 않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한편 경기가 끝나고 불과 1달 6일이 지난 1977년 6월 27일 고메즈와 KO패의 상흔(傷痕)이 가시기도 전에 염동균은 홍수환과 신설 WBA J. 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에 나갈 한국 대표 선발전을 벌인다.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10회전 경기가 끝난다.

경기 채점은 김진국 주심은 59ㅡ57 김광수 부심은 57ㅡ56 최영춘 부심은 58ㅡ57 홍수환의 3ㅡ0 판정승이었다. 비록 근소하게 염동균이 패했어도 최악의 상태에서도 매우 선전한 경기였다.

한편 홍수환은 4강전에서 다나까 후따로(일본)를, 결승전에서 카라스키야(파나마)를 차례로 꺾고 국내 최초로 2체급 석권에 성공하였다.


홍수환(좌측)과 염동균의 2차 전

염동균과 홍수환은 1980년 12월19일 2차전을 펼쳤다.

이 대결에서 1차전과 달리 홍수환은 연습량이 부족했는지 염동균의 공세에 왼쪽 눈이 감기고 코피를 쏟으면서 고전하였다.

하지만 심판진은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노병들에게 사이좋게 무승부를 선언하였다.


홍수환(왼쪽)과 염동균의 1차전 경기 모습.

한국 타이틀 14차 방어, 동양 타이틀 5차 방어, 세계 타이틀 1차 방어에 성공하며 프로통산 66전 54승(21KO)5패 7 무승부를 기록한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염동균은 링을 떠난다.

이후 대전시 중구에 동균 프로모션을 차리고 옥천 출신의 두 체급 세계 챔피언 이열우(옥천고)와 1989년 국제대회(필리핀)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김왕순(대전체고) 등 쌍두마차를 발굴하면서 복싱 저변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염동균은 서울로 입성 일송 프로모션을 설립해, 황충재ㅡ 황준석 김광민ㅡ김득구 라이벌전을 비롯한 장정구·문성길·박종팔·유명우·김환진·김철호의 세계 타이틀전을 개최하면서 흥행의 마술사로 불리었다.

또한 미리노 프로모션을 대표를 겸직하면서 21살의 유망주 최요삼에게 고도의 기술을 전수해, 그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데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동균 프로모션 대표 염동균.

세계 챔피언 출신으로 최초로 KBC(한국권투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그는 팔순을 눈앞에 둔 오늘날까지 극동 프로모션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복싱 외길을 꾸준하게 걷고 있다.

그런 우직함을 몸소 보여주는 염동균 챔프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복싱 팬들의 전폭적인 응원과 성원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