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칼럼] 사상 최초로 암표상까지 등장한 허영모 문성길의 라이벌전
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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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조영섭 기자] 한국 아마복싱 최고의 라이벌전 백미는 1980년대 중반 펼쳐진 밴텀급의 문성길과 허영모의 2차전이다. 우선 1964년 7월 순천태생의 허영모는 1978년 3월 순천 이수 중 2학년 때 배구선수에서 복싱으로 전환 그의 복싱 역사가 시작된다. 1979년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 전국을 석권한 허영모는 1980년 순천금당고에 입학하면서 45Kg급에서 김종옥 최점환에 패하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1981년 48Kg급으로 월장 초(超) 고교급 선수로 변신한 허영모는 최점환 김광선 오광수 등을 제압하면서 전국대회 3관왕을 이룩한다. 그해 11월 17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허영모는 제2회 몬트리올 월드컵대회 결승과 1982년 5월 뮌헨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 선수권 4강에서 불가리아의 무스타포프에게 패했지만 세계 무대에서 그의 정교한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무스타 포프는 1988년 서울올림픽 48Kg급 결승에서 미국의 카바할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였다.
전열을 추수린 허영모는 2개월 후에 벌어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0월에 개최된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 고교생 국가대표로 전방위에서 맹활약하였다. 이에 반해 1961년 7월 영암군 도포면 출신의 문성길은 1978년 전남체고에 육상부로 진학을 시도했지만 탈락하고 1년 재수하여 1979년 목포 덕인고에 육상부로 입학한다. 얼마 후 복싱부로 전환한 문성길은 고교 시절 3년 동안 각종 대회에서 김창렬(순천금당고)에 3연패 최주영(익산 남성고)에 2연패 김상수(대구 서부 권투) 정창구 (경주 상고) 김용호(조대부고)에게 연달아 패한 미완의 대기였다. 여담이지만 훗날 문성길은 태릉선수촌 불암산 편도 4.5Km를 기록적인 21분 7초에 주파할 정도로 지구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1982년 3월 문성길은 목포대학에 전국대회 금메달이 없어 절반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이에 반해 1983년 허영모는 동료 복서 4명을 동반 진학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스펙을 뿜어내면서 한국체대에 입학하였다. 문성길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54Kg급에서 태국의 퐁수리에 3회 역전 KO승을 거두면서 국제무대에서 도래를 시작한다. 1983년 킹스컵 금메달. 로마 월드컵 은메달. 1984년 LA 올림픽에서 51Kg급 8강에 진출한 허영모는 올림픽을 마친 1984년 12월 14일 문성길의 체급인 밴텀급 54Kg급으로 체급을 올리면서 전국선수권대회에서 허영모는 문성길과 피할수 없는 일전을 벌인다.
이 경기에서 허영모는 컴퓨터 복서답게 펀치력과 체력으로 무장한 문성길의 안면에 유효타를 수차 례 적중시키면서 초반에 우세하게 경기를 펼쳤다. 혼전 중인 2회 허영모는 채용석 주심으로부터 파울(Paul)을 선언 당했다. 하지만 안정된 페이스를 유지하며 선전하였다. 그러나 마의 3회 체력이 소진된 허영모를 향한 문성길의 강력한 파상공격을 펼치자 허영모는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3회를 마친다.
1차전은 3ㅡ2로 문성길이 허영모에 승리한다. 1985년 7월14일 제4회 로마 월드컵 선발전에서 허영모와 문성길은 2차전을 벌인다. 이 대결은 1차전이 워낙 명승부 경기를 펼친 여파 때문인지 2차전에서는 아마복싱 사상 최초로 암표상까지 등장할 정도로 빅카드였다. 당시 일반석은 1500원 링사이드 관람석은 3000원이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 예매를 시작하자 1700장이 삽시간에 매진되는 진풍경이 연출되면서 암표상까지 등장하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이 경기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허영모는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적극적인 난타전을 펼쳐면서 칼날처럼 예리한 레프트 훅으로 2차례 다운을 탈취한다. 탄력을 받은 허영모는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내뻗은 회심의 라이트 일격에 문성길은 또다시 큰 충격을 받는다. 허영모의 완벽한 RSC 승이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아마추어 경기는 한 라운드에서 3회 다운을 시키면 자동으로 RSC승으로 경기가 끝나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석인 주심은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 시켰다. 잠시 후 조석인 주심은 문성길의 펀치를 맞은 허영모에게 다운을 선언하면서 문성길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2회부터 문성길은 서서히 전력을 끌어올린다. 3회 체력이 고갈된 허영모는 문성길의 강공에 전전긍긍하면서 수세에 몰린다.
이 경기도 1차전과 동일한 3ㅡ2 판정에 허영모는 또다시 고개를 숙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허영모의 스승인 한국체대 유종만 교수는 조석인 주심이 중학교 때부터 애지중지(愛之重之) 성장시킨 애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유종만 교수 입장에서 볼 때 허영모의 1회 RSC 승을 선언해도 무방한 상황에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한 스승인 조석인 주심이 얼마나 야속하고 미웠을까?. 점잖은 성품의 유종만 교수는 허영모가 문성길에 패하면서 고개를 크게 떨구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25년 전 어느날 허영모에게 패전의 빌미를 제공한 조석인 전북체육회 국장과 필자의 체육관에서 담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분은 서두에 문성길과 허영모의 2차전 대결을 회고하면서 3회에 클린치를 일관하는 허영모에게 파울을 선언하려고 하자 허명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선생님 제발 한번 봐주세요! 라며 애원하듯이 말했다고 전했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왜 문성길에게 1회 RSC 패를 선언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필자의 질문에 조석인 국장은 문성길이 고교 시절 자신 의 제자 최주영(이리 남성고)에게 2번씩이나 억울하게 패한 모습이 떠올라 차마 냉정하게 중간에 경기를 스톱시킬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1985년 11월6일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월드컵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한 문성길은 북미 대표 로드리게스(푸에르 토리코)에게 무자비한 폭격을 감행 3연속 KO. RSC 승을 거두면서 대회 최우수복서(MVP)로 선정되었다. 문성길의 월드컵대회 최우수복서로 탄생 된 이면에는 허영모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 아마복싱도 상비군제도를 도입하여 치열한 내부경쟁을 통해 전력을 한 단계씩 끌어올려 침체된 한국 아마복싱의 부활에 시금석이 되길 기대 해 본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1981년 48Kg급으로 월장 초(超) 고교급 선수로 변신한 허영모는 최점환 김광선 오광수 등을 제압하면서 전국대회 3관왕을 이룩한다. 그해 11월 17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허영모는 제2회 몬트리올 월드컵대회 결승과 1982년 5월 뮌헨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 선수권 4강에서 불가리아의 무스타포프에게 패했지만 세계 무대에서 그의 정교한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무스타 포프는 1988년 서울올림픽 48Kg급 결승에서 미국의 카바할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였다.
전열을 추수린 허영모는 2개월 후에 벌어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0월에 개최된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 고교생 국가대표로 전방위에서 맹활약하였다. 이에 반해 1961년 7월 영암군 도포면 출신의 문성길은 1978년 전남체고에 육상부로 진학을 시도했지만 탈락하고 1년 재수하여 1979년 목포 덕인고에 육상부로 입학한다. 얼마 후 복싱부로 전환한 문성길은 고교 시절 3년 동안 각종 대회에서 김창렬(순천금당고)에 3연패 최주영(익산 남성고)에 2연패 김상수(대구 서부 권투) 정창구 (경주 상고) 김용호(조대부고)에게 연달아 패한 미완의 대기였다. 여담이지만 훗날 문성길은 태릉선수촌 불암산 편도 4.5Km를 기록적인 21분 7초에 주파할 정도로 지구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1982년 3월 문성길은 목포대학에 전국대회 금메달이 없어 절반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이에 반해 1983년 허영모는 동료 복서 4명을 동반 진학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스펙을 뿜어내면서 한국체대에 입학하였다. 문성길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54Kg급에서 태국의 퐁수리에 3회 역전 KO승을 거두면서 국제무대에서 도래를 시작한다. 1983년 킹스컵 금메달. 로마 월드컵 은메달. 1984년 LA 올림픽에서 51Kg급 8강에 진출한 허영모는 올림픽을 마친 1984년 12월 14일 문성길의 체급인 밴텀급 54Kg급으로 체급을 올리면서 전국선수권대회에서 허영모는 문성길과 피할수 없는 일전을 벌인다.
이 경기에서 허영모는 컴퓨터 복서답게 펀치력과 체력으로 무장한 문성길의 안면에 유효타를 수차 례 적중시키면서 초반에 우세하게 경기를 펼쳤다. 혼전 중인 2회 허영모는 채용석 주심으로부터 파울(Paul)을 선언 당했다. 하지만 안정된 페이스를 유지하며 선전하였다. 그러나 마의 3회 체력이 소진된 허영모를 향한 문성길의 강력한 파상공격을 펼치자 허영모는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3회를 마친다.
1차전은 3ㅡ2로 문성길이 허영모에 승리한다. 1985년 7월14일 제4회 로마 월드컵 선발전에서 허영모와 문성길은 2차전을 벌인다. 이 대결은 1차전이 워낙 명승부 경기를 펼친 여파 때문인지 2차전에서는 아마복싱 사상 최초로 암표상까지 등장할 정도로 빅카드였다. 당시 일반석은 1500원 링사이드 관람석은 3000원이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 예매를 시작하자 1700장이 삽시간에 매진되는 진풍경이 연출되면서 암표상까지 등장하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이 경기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허영모는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적극적인 난타전을 펼쳐면서 칼날처럼 예리한 레프트 훅으로 2차례 다운을 탈취한다. 탄력을 받은 허영모는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내뻗은 회심의 라이트 일격에 문성길은 또다시 큰 충격을 받는다. 허영모의 완벽한 RSC 승이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아마추어 경기는 한 라운드에서 3회 다운을 시키면 자동으로 RSC승으로 경기가 끝나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석인 주심은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 시켰다. 잠시 후 조석인 주심은 문성길의 펀치를 맞은 허영모에게 다운을 선언하면서 문성길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2회부터 문성길은 서서히 전력을 끌어올린다. 3회 체력이 고갈된 허영모는 문성길의 강공에 전전긍긍하면서 수세에 몰린다.
이 경기도 1차전과 동일한 3ㅡ2 판정에 허영모는 또다시 고개를 숙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허영모의 스승인 한국체대 유종만 교수는 조석인 주심이 중학교 때부터 애지중지(愛之重之) 성장시킨 애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유종만 교수 입장에서 볼 때 허영모의 1회 RSC 승을 선언해도 무방한 상황에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한 스승인 조석인 주심이 얼마나 야속하고 미웠을까?. 점잖은 성품의 유종만 교수는 허영모가 문성길에 패하면서 고개를 크게 떨구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25년 전 어느날 허영모에게 패전의 빌미를 제공한 조석인 전북체육회 국장과 필자의 체육관에서 담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분은 서두에 문성길과 허영모의 2차전 대결을 회고하면서 3회에 클린치를 일관하는 허영모에게 파울을 선언하려고 하자 허명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선생님 제발 한번 봐주세요! 라며 애원하듯이 말했다고 전했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왜 문성길에게 1회 RSC 패를 선언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필자의 질문에 조석인 국장은 문성길이 고교 시절 자신 의 제자 최주영(이리 남성고)에게 2번씩이나 억울하게 패한 모습이 떠올라 차마 냉정하게 중간에 경기를 스톱시킬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1985년 11월6일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월드컵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한 문성길은 북미 대표 로드리게스(푸에르 토리코)에게 무자비한 폭격을 감행 3연속 KO. RSC 승을 거두면서 대회 최우수복서(MVP)로 선정되었다. 문성길의 월드컵대회 최우수복서로 탄생 된 이면에는 허영모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 아마복싱도 상비군제도를 도입하여 치열한 내부경쟁을 통해 전력을 한 단계씩 끌어올려 침체된 한국 아마복싱의 부활에 시금석이 되길 기대 해 본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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