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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 지망생에서 레슬링으로 전환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사나이

26.06.15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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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 지망생에서 레슬링으로 전환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사나이

기자명조영섭 복싱 전문기자


권투선수가 꿈이었던 레슬러 한명우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집필하듯 언론사에 복싱 열전을 연재한지 어느덧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런 의미 있던 지난 주말 대한체육회 산하(傘下) 한국인 체육회 사무실이 위치한 대한체육회를 찾았다.

이곳에서 한명우 한국 체육인 회 사무총장과 면담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날 사무실에 한명우 총장의 남산 공전 2년 선배인 오상환 프로팩코리아 이사도 참석 기쁨이 배가 되었다.

지난해 5월 조철제 대한 복싱연맹 전무의 구순 잔치 때 참석하면서 필자와 인연을 맺은 오상환 이사는 얼마 전 조철제 전무 주선으로 SM 홍성민 대표를 비 롯 지인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교감을 나눈 체육인이다.

이때 오상환 이사는 LG 트윈스 이광은 감독. 프로레슬링 협회 김수홍 회장, 동국대 출신의 레슬러 권태갑 선배 등 필자의 지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워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새롭다.

한명우 총장은 오상환 선배에 대해 그분은 모교(남산공전) 체육 발전 기금을 꾸준히 쾌척 체육 발전에 이바지하는 정의로운 사업가라고 밝혔다.



잠시 후 원로회 총무 임형운 전(前)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과 KBC 아나운서 출신 김현태 씨가 이곳 사무실을 방문했다.

한명우 총장의 폭넓은 인맥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1950년 서울 태생의 임형운 총무는 1968년 전국 선수권(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경기인 출신이다.

그는 심판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한국복싱의 기승전결 흥망성쇠를 현장에서 목도(目睹)한 원로 복싱인이다.

연세대학 출신의 김현태 아나운서는 2004년부터 2018년까지 복싱과 야구 종목에서 전문 케스터로 활약한 방송인이다.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식견 높은 김현태 실장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 필자의 전공과목(?)인 복싱과 야구 종목을 주제로 담화를 나누었다.



한명우 총장은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레슬링 82Kg 급에서 인상적인 붕대 투혼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획득한 주인공이다. 필자가 레슬러 한명우 총장에게 관심을 갖은 이유는 그가 바로 전직 복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한명우 총장은 1956년 11월21일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가 자리 잡은 충남 당진 태생이다.

긴 해안선을 끼고 있는 이곳은 한때 당나라와의 교역 전진기지였기 때문에 당진(唐津)이란 지명이 붙여진 고장이다.

이처럼 유서 깊은 고장 당진에서 태어난 한명우는 학창 시절 턱걸이를 한번 에 50회를 해낼 정도로 무쇠팔을 보유한 소년 장사였다.

이런 주무기를 바탕으로 한명우는 1974년 남산 공전 복싱부에 입학한다. 남산 공전은 이창길 김현치 김창석 황철순 박인규는 역대급 복서들을 배출한 복싱 명문 학교였다.



복싱에 매진하던 어느날 당시 대한 레슬링협회에서 주관한 우수선수발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가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면서 한명우는 복서에서 레슬러로 진로가 변경된다.

건국대학 3학년인 1979년 74Kg급에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한명우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협회에서는 한명우를 제외하고 대신 고진원을 출전시킨다. 협회의 도깨비장난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환멸을 느낀 한명우는 레슬링을 접고 본업인 복서로 전향하기 위해 김치복 관장이 운영하는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유원건설 복싱체육관을 찾아 훈련을 시작한다.

1952년 5월 부산태생의 김치복 관장은 1974년 제7회 동경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LF 급 최종결승에서 박찬희와 초접전을 펼친 스타 복서였다.



한명우는 김치복 관장의 세심한 지도를 발판으로 기량이 일취월장 성장하면서 한국 중량급의 기대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시 레슬링협회 관계자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설득에 결국 한명우는 글러브를 내려놓는다.

1983년 국가대표에 재발탁되어 캐나다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LA 올림픽 출전을 위한 예열(豫熱)을 마친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한명우는 본선 4회전에서 핀란드 선수에게 1점 차로 패하면서 6위에 그친다.

귀국한 한명우는 동료들인 유인탁 김원기가 금메달을 획득하고 전국을 순회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전남 홍도를 찾았다.

그러나 갑자기 홍도 앞바다에서 울컥한 심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85년 세계 선수권 대회(헝가리)에서도 한명우는 역시 5연승을 달리다 에이징 커브 (Aging Curve)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6위에 머문다.

1986년 30세 노장 레슬러 한명우는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오른쪽 무릎부상이 심해 연골 제거 수술을 한후 현역에서 물러나 대표팀 트레이너로 전환한다.

그래도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접을수 없었던 한명우는 31살이던 1987년 플레잉 코치로 전환 82 Kg급으로 대표선발전에 출전했다. 하지만 어린 후배들에게 밀려 탈락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88년 한명우는 88 서울올림픽 선발전에서 10년 후배들과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극적으로 본선에 진출한다.

본선 4차전에서 한명우는 이토 (일본)의 머리에 버팅을 당해 이마에 여덟바늘 꿰매는 접합수술을 받으면서 결승에 진출 터키의 네스 겐칼프에 판정승을 거두고 한명우의 15년 레슬링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때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레슬링 입문 15년 만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그는 좌절과 실의의 연속이었지만 모든 걸 극복하고 걷어 올린 금메달이라 그 가치는 더욱더 빛을 발했다.

한국선수단의 주장이었던 그는 투혼이 높게 평가돼 일본 체육 잡지 <넘버>가 뽑은 서울올림픽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었다. 필자가 오랜 세월 지켜본 한명우는 철학자 니체가 갈파한 진정한 강한 인물의 표본(標本)이란 생각이 든다.


니체는 초월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한 인간이란 누구에게 한 번도 지지 않는 사람도 아니고 역경에도 흔들림이 없는 강철 인간도 아니다. 진짜 강한 인간 이란 살면서 밑바닥까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사람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 절망의 바닥에서 스스로 일어나 고통을 정면으로 돌파 한계를 뛰어넘는 바로 그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은퇴 후 레슬링협회 전무를 거쳐 2008년 북경 올림픽 때부터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한명우 총장은 체육계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불릴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한명우 사무총장의 인생 3막이 더욱 빛을 발하길 기대하면서 이번 주 컬럼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