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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병언 회장 격려금 천만원을 거절한 복싱 국가대표는?

26.05.1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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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병언 회장 격려금 천만원을 거절한 복싱 국가대표는?

기자명조영섭 복싱 전문기자



지난해 어느날 청양에서 개최되는 아마추어 복싱 경기를 참관하려고 경기장을 찾았다. 체육관 입구에서 필자는 김유현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과 조우했다.

그리고 동행한 홍성민 SM 대표에게 김유현 심판위원을 소개했다. 사실 대다수 젊은 층의 복싱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활약한 전설의 복서 김유현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이번주 칼럼은 베일에 가려진 그의 진품명품 이미지를 드러내 보려고 한다.

김유현은 1961년 강원도 원주태생이다. 역사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던 원주는 고려시대에 거란족·몽고족·홍건족의 침입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근세에는 6·25 동란 때 피해를 많이 입은 도시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복싱의 고장 원주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지용주의 본향이다.

바로 그 지용주가 은퇴와 함께 지도자로 변신해, 1978년 원주 농고에 재학 중인 배구선수 김유현을 복싱으로 전환시키면서 그의 복싱 스토리가 시작된다. 191Cm 큰키의 왼손잡이 복서 김유현은 졸업반인 1980년 라이트 헤비급에서 기록적인 4관왕을 달성한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복싱계 페스탈로치라 불리는 온화한 성품의 박형춘 감독이 사령탑을 맡고 있는 경희대로 기수를 돌린다.

1981년 1월 제1회 한일 아마복싱 국가대표팀 정기전이 도쿄 고라꾸엔 체육관에서 열렸다. LH 급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김유현은 일본의 사또를 맞이해 공이 울린 후 불과 82초 만에 왼손 한방으로 상대를 다운시키며 통쾌한 RSC 승을 거둔다. 실신한 상대는 곧바로 엠뷸런스에 실려 나간다.

경기가 종료되자 김유현의 경기를 유심히 지켜본, 일본에서 사업을 한다는 분이 깜짝 등장한다.




그는 당시 대한복싱협회 조철제 전무에게 선수단을 위한 회식을 제의한다. 그때 조 전무는 지금 선수들이 체중조절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귀국를 한 후 연락을 드리겠다고 전했다.

조철제 사단의 선수단과 임원을 포함한 한국 대표팀 30여명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인물과 약속대로 서울 무교동 일식집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사업가는 바로 당시 삼우트레이딩 유병언 회장이었다. 그는 서두에 "나는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그곳에서 설움과 핍박을 많이 받으면서 지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 이유로 나는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가슴에 응어리가 많이 뭉쳤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김유현 선수가 일본 선수를 통쾌하게 한 방에 날려 버려 무척 흥분되고 기뻤다. 그리하여 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잠시 뒤 유병언 회장은 즉석에서 1천만원을 꺼내 "일본전 히어로(Hero) 김유현에게 전해달라"며 조철제 전무에게 건넸다. 이 돈을 받은 조 전무는 만찬이 끝난 뒤 식대 230만원을 제한 770만원을 김유현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김유현이 극구 사양했다.

결국 조 전무는 그 돈을 대한복싱협회 복싱기금으로 입금했다.



당시로부터 1년 3개월 전인 1979년 궁정동에서 발생한 10·26 사태 때 만찬장에 참석한 두 여인에게 김재규 부장의 수행비서 박흥주가 전달한 액수가 20만원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유현에게 천만원이란 돈은 상상할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당시 사회를 맡았던 김유현의 대학 은사이자 대한복싱협회 박형춘 사무국장은, 유병언이 자신이 태권도 유단자라고 과시하는 등 상당한 달변가 였다고 회상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1차 선발전(LH급)에서 김유현은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부상으로 아시안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4년 뒤 1986년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당시 헤비급에 출전한 김유현(상무)은 1회전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이라크의 이스마엘을 꺾는 대이변을 연출하며, 국내 복싱사상 최초로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김유현의 트레이닝을 담당한 상무팀 김창석 감독은 거구의 몸에서 뿜아내는 펀치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건초염이 동반된 어깨통증으로 고통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이 금메달은 1970년 김상만, 1978년 김기춘, 1982년 소배원이 아시안게임(헤비급) 준결승에서 모두 탈락한 아쉬움을 털어내면서 탄생한 금메달이었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이번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당시 헤비급에 출전할 예정인 김유현은 경희대 후배 백현만을 위해 스스로 한 체급 위인 슈퍼헤비급으로 출전한다.

김유현의 체급 양보로 인해 백현만이 헤비급에서 한국 올림픽 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백현만이 획득한 은메달의 배경에는 상대를 배려하고 희생한 김유현의 휴먼 스토리(Human story)가 감춰져 있어 진한 감동을 주었다.


김유현의 체급 양보로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백현만.

당시 백현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의 김유현은 슈퍼헤비급 기준체중 91Kg을 넘기기 위해 식사량을 2배 이상 늘렸다.

또 대소변을 꾹 참고 버티면서 슈퍼헤비급 한계체중 91Kg 이상으로 체중을 끌어올리는 곤욕을 치르며 계체량을 통과했다.

이에 반해 백현만은 거꾸로 헤비급 한계체중인 91 Kg 이하로 체중을 줄이려고 무려 8Kg을 감량하기 위해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결국 올림픽이라는 성대한 지구촌 잔치에서 김유현은 8강에서 패해 아깝게 메달권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백현만은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김유현의 배려에 보은했다. 은퇴 후 김유현은 원주시 단계동에서 아내와 함께 치악산이란 포장마차를 25년 이상 성실하게 운영하면서 탄탄하게 기반을 닦았다.

60대 중반을 훌쩍 넘은 현재 김유현은 사업을 접고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역시절 아름다운 미담을 여러 차례 실천한 대한복싱협회 김유현 심판에게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