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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근·고생근·이석운 등 스타 복서를 배출한 중 산 복싱체육관

26.05.06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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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던 5월의 첫 주말인 지난 5월2일 필자는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삼청각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열린 중산체육관 출신의 신두홍(77세) 선배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날 신두홍 은 자신이 중산체육관에서 훈련할 때 가장 친하게 지낸 국가대표를 출신 정영근이 현재 투병 생활 때문에 이곳에 올 수 없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신두홍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의 이창길과의 인연으로 중산체육관에 입관 선수 생활을 한 복서 출신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훈련하면서 성향이 비슷한 정영근을 만나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동료 복서 정영근이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1년 제5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위를 선양하자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신두홍은 복싱을 접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 내 친구 정영근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렇다면 나도 테헤란에서 종목을 바꿔 정영근을 능가하는 큰 성공해야겠다는 밑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는 1978년 3월 실행에 옮겨 테헤란에 입성 그곳에서 덤프트럭을 몰면서 악착같이 돈을 번다. 5년의 세월이 흘러 귀국한 그는 재투자를 통해 이젠 건물주가 되어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이에 반해 정영근은 1972년 뮌헨올림픽 선발전에서 주호에게 패하면서 출전이 좌절되자 아마복싱을 접고 그해 6월 프로에 전향 4년 5개월간 프로 생활을 하면서 17전을 소화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조민, 김상현, 조현복, 이춘산, 류 소리마치(일본) 등에게 치명적인 5패를 당하면서 1976년 11월 링을 떠났다.

그후 정영근은 체육관(오성)을 개관 1984년 LA 올림픽 대표 안달호 국내 챔피언 정상도를 배출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늘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가믐에 단비처럼 나타난 구세주가 바로 의인(義人) 신두홍이었다. 그는 친구 정영근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해주면서 그가 오래동안 체육관을 운영할수 있는 버팀목 역활을 해주었다. 각설하고 오늘 참석한 체육관 동문 중에 신두홍의 후배 황해남이 멀리 예산에서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현재 한백 건설회사 이사로 재직 중인 황해남은 1973년 한양대 공대에 입학한 엘리트 복서였다. 그해 제26회 전국 <신인> 선수권 대회(페더급)에서 파죽의 4연승(2KO)을 거두고 학사복서 황해남이 결승에 진출하자 당시 언론에서 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서울대학 출신으로(미들급) 국가대표로 출전한 제2의 조원민과 견주면서 1면에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결승에서 복병 이흥수(성동 중앙)에게 발목이 잡혀 준우승에 머물렀다. 오늘 이 자리에는 황해남의 둘째 딸 황희선 양이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2008년 예산 황토 아가씨 선발대회에서 진(眞)으로 뽑혀 예산 홍보대사로 활약한 재원이다.

큰딸도 국내에서 10명이 불과한 대한항공 여성 조종사로 현재 근무하고 있다. 황해남은 복싱인 가운데 자식 농사에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오늘 이 자리에는 정영진도 참석 자리를 빛냈다. 1955년 전북 고창 출신인 그는 천호 상고 재학시절인 1974년 제55회 전국체육대회 밴텀급 결승에서 부산 대표 서인석과 맞대결 은메달에 머물렀다.




이 패배는 천호 상고 복싱 감독 김동호 선생께서 격렬하게 항의할 정도로 매우 안타까운 패배였다. 서인석은 얼마 후 천호 상전 절친 전학수가 서인석을 꺾어 정영진의 억울한 패배를 달래주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킹스컵 국가대표 전학수와 정영진은 두 차례 맞대결 사이좋게 1승1패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오래전 타계한 김동호 선생은 1946년 충남 천안시 성환읍 출신이다. 그분은 복싱인으로는 이래적(異例的)으로 단국대에서 수학을 전공 천호 상고에서 수학 선생을 하면서 복싱 감독을 겸직했다.

성동 중앙체육관 출신의 김동호 선생은 인품이 고결(高潔)하고 강직하신 분이다. 오늘 본 칼럼을 통해 김동호 선생의 사진을 바라보는 이흥수 전 국가대표팀 감독 등 다수의 원로 복싱인 들은 한 장의 사진을 통해 그분과의 지난날 추억을 회상해 볼 수 있는 계기(契機)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분은 천호 상고 복싱부 감독 시절 이흥수란 복서의 지도자 자질을 간파하고 그가 서울체고에 복싱 지도자로 입성할수 있게 단초(端初)를 제공한 분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는 신(神) 의 한수였다.

중산체육관은 1964년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소강 민관식이 설립한 체육관으로 이분은 1966년 이 땅에 태릉선수촌을 건립 하는등 한국스포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65년 한국복싱 저변 확대를 위해 친히 중산체육관을 설립하셨다.




이를 바탕으로 1971년 제5회 테헤란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이 획득한 금메달 3개를 모두 중산체육관 선수들이 모두 독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LF급 이석운, B급 고생근, W급 정영근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들 3명은 1972년 뮌헨올림픽이 끝나고 순차적으로 프로에 전향했다. 정영근에 이어 면돗날 복서 고생근은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정순현의 파상공격에 9회 침몰했고 이석운도 3승2패의 평범한 전적을 남기고 1년 만에 글러브를 벗었다.

여담이지만 아마와 프로를 모두 경험한 필자가 볼 때는 확률적으로 국가대표 대표급 선수들이 거친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왜냐면 프로 복서들은 북한산 야생 들개들처럼 지구력을 바탕으로 용맹성을 품고 자유롭게 활동한다. 하지만 단기전에 특화(特化)된 아마 복서들은 엄격한 아마복싱 규정 속에 제약을 받으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권투를 적당히 잘한 오늘 참석한 5명의 중산 체육관출신 전직 복서 가운데 2명은 (신두홍 송기옥)은 일찍 복싱을 접고 사회에 뛰어들어 건물주로 변신에 성공하였고 박병삼이라는 분은 횡성에서 소 사육장을 개설 경제 독립에 성공했다.

또한 정영진은 현재 한 직장에 무려 46년간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요로운 노후생활을 하고 있다. 복싱에서 올림픽에 출전하는등 발군(拔群)의 실력을 발휘하는 유명 복서보다는 신두홍 처럼 권투를 적당히 잘하는 복서가 인생 후반부가 풍요롭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어쩌면 신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재능을 한꺼번에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끝으로 오늘 신두홍 선배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 올리면서 중산체육관 동문 들 건승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