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시흥시 복싱협회장 취임식장서 만난 사람들
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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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서 로드짐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곽성운 관장이었다. 4월11일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서 제9대 시흥시 복싱협회장 취임식이 열린다는 전갈(傳喝)이었다.
1974년 시흥 태생의 곽성운은, 서울 양평동에서 21세기 체육관을 운영하는 박현성 관장의 문하생으로 프로전적 4전 3승(2KO)1무의 전적을 기록한 유망주였다.
그러나 목디스크로 인해 복싱을 접고 귀향해 현재 이곳에서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렇게 평범하게 생활하던 곽 관장은, 오래 전 어느날 김기수·박찬희·허영모에 이어 한국 아마복싱 사상 4번째로 고교생 국가대표로 발탁된 풍운아(風雲兒) 송광식을 우연히 만난다.
이를 계기로 송광식은 친동생 같은 곽성운 관장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면서 이곳에 정착해 오늘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이날 시흥시 복싱협회장에 취임한 9대 곽성진 회장이 곽성운 관장의 친형이어서 반가움이 배가됐다.
현재 안산시 단원구에서 한국종합상사 대표로 재직 중인 곽성진 회장은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시흥시 복싱 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취임사를 통해 밝혔다.
이날 행사장에는 WBC 라이트 플라이급 장정구 챔피언을 위시해 WBA 슈퍼페더급 챔피언 최용수, WBC 밴텀급 챔피언 변정일, 동양 J.웰터급 챔피언 이상호, 86아시안게임(페더급) 금메달 박형옥, 2000년 제27회 시드니올림픽 대표 출신의 황성범 등 기라성(綺羅星) 같은 복서들이 대거 참석하며 취임식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이 고장 시흥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복서 함상명이 태어난 고장이다. 또한 역사적 인물로는 고려 현종때 거란의 소배압 장군을 물리친 구국의 명장 강감찬 장군도 시흥 출신이다.
이날 행사장에는 이건섭 시흥시의회 의원도 참석해, 시흥시 복싱 발전에 초석(礎石)이 되는 역할을 하겠다고 역설했다.
이날 오랜만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박형옥은 1964년 전남 보성 태생이다. 1984년 LA 올림픽(페더급)에 출전해 8강에서 베네주엘라 선수에게 3회 한 차례 다운을 뺏으면서 3ㅡ2로 승리했다.
하지만 남미 심판 2명이 배석한 2차 배심원 판정에서 1ㅡ4 로 패하면서, 메달 문턱에서 탈락한 억울한 희생자로 남았다.
참고로 올림픽 동장 연금은 52만5천원이고, 비과세라 세금도 없다. 그럼에도 심기일전한 박형옥은 이후 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올림픽에서 당한 아쉬운 패배를 달랬다.
이런 박형옥의 경기를 TV로 지켜보면서 송광식은 아쉬운 미련과 서글픔이 함께 밀려왔을 것이다. 왜냐면 페더급은 1983년 2월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송광식이 신창석을 불과 110초 만에 KO로 꺽고 국가대표로 발탁된 체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킹스컵과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송광식은 1983년 가을 어느날 선수촌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야음(夜陰)을 틈타 선수촌을 탈출하면서 스토리가 이어진다.
결국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페더급에서 대표팀에 합류한 복서가 바로 박형옥이었다.
송광식의 피지컬은 자타가 공인하는 역대급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올림픽에 2회 연속 출전한 전진철(원광대)을 비롯해 아시아선수권 2회 연속 금메달 송경섭(한국체대), 국내 최초로 5체급을 석권한 신창석(경희대)을 차례로 꺾은 강타자가 바로 송광식이었다.
이에 반해 박형옥은 송광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으며 거북이처럼 늦은 출발을 하였다.
하지만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며 결국엔 한국 대표로 아시아 정상에 오르면서 기염을 토했다. 당시 송광식은 밴텀급에서 아성을 구축한 국가대표 문성길이 가장 인정한 복서였다.
하지만 잠재력을 폭발시키지 못하고 퇴촌한 점이 못내 아쉬웠던 송광식의 지난날 추억이다.
오늘 참석한 1966년 11월 충남 태안 태생의 변정일도 프로 테스트에 3번 탈락한 평범한 왼손잡이 복서였다. 결국은 인내와 끈기로 버티면서 88 서울 올림픽 출전한 데 이어 1990년 2월 프로로 전향해 1993년 3월 WBC 밴텀급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프로 테스트에 연거푸 탈락한 아쉬움을 털어냈다.
문득 이 문장에 적합한 성경 글귀가 떠오른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競走者)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有力者)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는 시기와 우연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다"
1987년 상무를 재대한 송광식은 88 프로모션(대표 심영자)과 계약을 하고 프로에 진출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엔 익수제약 김선 관장과 이중계약 파문으로 인해 또다시 발목이 잡혀 1년 이란 기간을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했다. 1988년 25살에 프로에 전향한 뒤 10연승(6KO)을 질주했다.
그리고 1993년 3월 22일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송광식이 은퇴한 지 정확하게 6일 후인 1993년 3월28일 WBC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한 변정일은 멕시코의 챔피언 빅토르 나바레스에 3ㅡ0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
송광식이 1983년 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신창석과 권길문을 차례로 KO 시키면서 화려한 대관식(戴冠式)을 펼칠 때, 당시 변정일(원진체)은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한 새내기였다.
각설하고 13년 전 우연한 계기로 이곳에 시흥에 정착한 송광식은 "힘이 들더라도 참고 인내하면 그 뒤에는 무지개와 더 밝은 태양이 기다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리하여 지난날 자신의 실책을 재현(再現)하지 않고 이곳에서 성실하게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안정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9대 시흥시 복싱협회 회장에 취임한 곽성진 회장과 송광식 시흥시 체육회 감독을 구심점(求心點)으로 다수의 유망 복서가 배출되길 기대해 본다.
1974년 시흥 태생의 곽성운은, 서울 양평동에서 21세기 체육관을 운영하는 박현성 관장의 문하생으로 프로전적 4전 3승(2KO)1무의 전적을 기록한 유망주였다.
그러나 목디스크로 인해 복싱을 접고 귀향해 현재 이곳에서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렇게 평범하게 생활하던 곽 관장은, 오래 전 어느날 김기수·박찬희·허영모에 이어 한국 아마복싱 사상 4번째로 고교생 국가대표로 발탁된 풍운아(風雲兒) 송광식을 우연히 만난다.
이를 계기로 송광식은 친동생 같은 곽성운 관장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면서 이곳에 정착해 오늘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이날 시흥시 복싱협회장에 취임한 9대 곽성진 회장이 곽성운 관장의 친형이어서 반가움이 배가됐다.
현재 안산시 단원구에서 한국종합상사 대표로 재직 중인 곽성진 회장은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시흥시 복싱 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취임사를 통해 밝혔다.
이날 행사장에는 WBC 라이트 플라이급 장정구 챔피언을 위시해 WBA 슈퍼페더급 챔피언 최용수, WBC 밴텀급 챔피언 변정일, 동양 J.웰터급 챔피언 이상호, 86아시안게임(페더급) 금메달 박형옥, 2000년 제27회 시드니올림픽 대표 출신의 황성범 등 기라성(綺羅星) 같은 복서들이 대거 참석하며 취임식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이 고장 시흥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복서 함상명이 태어난 고장이다. 또한 역사적 인물로는 고려 현종때 거란의 소배압 장군을 물리친 구국의 명장 강감찬 장군도 시흥 출신이다.
이날 행사장에는 이건섭 시흥시의회 의원도 참석해, 시흥시 복싱 발전에 초석(礎石)이 되는 역할을 하겠다고 역설했다.
이날 오랜만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박형옥은 1964년 전남 보성 태생이다. 1984년 LA 올림픽(페더급)에 출전해 8강에서 베네주엘라 선수에게 3회 한 차례 다운을 뺏으면서 3ㅡ2로 승리했다.
하지만 남미 심판 2명이 배석한 2차 배심원 판정에서 1ㅡ4 로 패하면서, 메달 문턱에서 탈락한 억울한 희생자로 남았다.
참고로 올림픽 동장 연금은 52만5천원이고, 비과세라 세금도 없다. 그럼에도 심기일전한 박형옥은 이후 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올림픽에서 당한 아쉬운 패배를 달랬다.
이런 박형옥의 경기를 TV로 지켜보면서 송광식은 아쉬운 미련과 서글픔이 함께 밀려왔을 것이다. 왜냐면 페더급은 1983년 2월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송광식이 신창석을 불과 110초 만에 KO로 꺽고 국가대표로 발탁된 체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킹스컵과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송광식은 1983년 가을 어느날 선수촌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야음(夜陰)을 틈타 선수촌을 탈출하면서 스토리가 이어진다.
결국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페더급에서 대표팀에 합류한 복서가 바로 박형옥이었다.
송광식의 피지컬은 자타가 공인하는 역대급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올림픽에 2회 연속 출전한 전진철(원광대)을 비롯해 아시아선수권 2회 연속 금메달 송경섭(한국체대), 국내 최초로 5체급을 석권한 신창석(경희대)을 차례로 꺾은 강타자가 바로 송광식이었다.
이에 반해 박형옥은 송광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으며 거북이처럼 늦은 출발을 하였다.
하지만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며 결국엔 한국 대표로 아시아 정상에 오르면서 기염을 토했다. 당시 송광식은 밴텀급에서 아성을 구축한 국가대표 문성길이 가장 인정한 복서였다.
하지만 잠재력을 폭발시키지 못하고 퇴촌한 점이 못내 아쉬웠던 송광식의 지난날 추억이다.
오늘 참석한 1966년 11월 충남 태안 태생의 변정일도 프로 테스트에 3번 탈락한 평범한 왼손잡이 복서였다. 결국은 인내와 끈기로 버티면서 88 서울 올림픽 출전한 데 이어 1990년 2월 프로로 전향해 1993년 3월 WBC 밴텀급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프로 테스트에 연거푸 탈락한 아쉬움을 털어냈다.
문득 이 문장에 적합한 성경 글귀가 떠오른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競走者)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有力者)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는 시기와 우연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다"
1987년 상무를 재대한 송광식은 88 프로모션(대표 심영자)과 계약을 하고 프로에 진출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엔 익수제약 김선 관장과 이중계약 파문으로 인해 또다시 발목이 잡혀 1년 이란 기간을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했다. 1988년 25살에 프로에 전향한 뒤 10연승(6KO)을 질주했다.
그리고 1993년 3월 22일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송광식이 은퇴한 지 정확하게 6일 후인 1993년 3월28일 WBC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한 변정일은 멕시코의 챔피언 빅토르 나바레스에 3ㅡ0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
송광식이 1983년 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신창석과 권길문을 차례로 KO 시키면서 화려한 대관식(戴冠式)을 펼칠 때, 당시 변정일(원진체)은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한 새내기였다.
각설하고 13년 전 우연한 계기로 이곳에 시흥에 정착한 송광식은 "힘이 들더라도 참고 인내하면 그 뒤에는 무지개와 더 밝은 태양이 기다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리하여 지난날 자신의 실책을 재현(再現)하지 않고 이곳에서 성실하게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안정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9대 시흥시 복싱협회 회장에 취임한 곽성진 회장과 송광식 시흥시 체육회 감독을 구심점(求心點)으로 다수의 유망 복서가 배출되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