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복싱 영웅 비차이 카드포를 제압한 이창환을 아십니까
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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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0년 북경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창환.
88서울올림픽을 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마추어 국가대표선수들이 대거 퇴진하자 한국 아마복싱 대표팀은 침체기를 맞이한다.
이때 한국의 막강 주먹에 눌려왔던 북한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복싱 유망주들이 경칩에 개구리 튀어나오듯 고개를 쳐든다.
북한의 이광식과 김덕남, 태국의 비차이 카드포와 사사쿨, 필리핀의 벨라스코 등 경량급 5명이 그 주인공이다. 이때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지도자가 68년 멕시코올림픽 대표 출신의 김승미 감독이다. 그때 그 시절 한국복싱 꿈나무들도 퇴진한 선배들 공백을 메우려고 하나둘씩 알을 깨고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이 중 대표적인 복서 한 명이 바로 이창환이다. 이창환은 1969년 2월3일 전남 화순 태생이다.
이창환은 유년(幼年)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고 성장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복서다.
그는 1983년 대동 중학 2학년 때 답십리에 위치한 한국화약체육관에서 황철순 감독의 지도로 복싱을 익혔다. 이곳에서 창환은 부모를 일찍 잃은 서러움과 안타까움을 샌드백을 두들기며 달랜다.
졸업반인 1984년, 이창환은 중등부 42 Kg '모스키토급'에서 그랜드 슬램(4관왕)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는다. 그 가운데 2개 대회는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발군(拔群)이었다.
1985년 창환은 황철순 감독이 이끄는 리라공고에 진학한다. 45Kg '코크급'으로 체급을 올린 그해 이창환은 박성춘(순천 금당고)·조동범(서울체고)의 두터운 벽에 막혀 내리 3연패를 당하며 진통을 겪는다.
박성춘 서울시복싱협회장(왼쪽)과 서울시 체육회 수석팀장 이창환.
수년 전 서울시 복싱협회장을 지낸 박성춘(한국체대)은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전인덕 (원주시청)에 1승1패, 아시안게임 금메달 양석진(동아대)에 2연승,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 조동범(한국체대)에 1패를 당한 엘리트 복서였다.
한편 1986년 리라 공고 2학년 때 전국대회 김명복배와 88꿈나무대회를 석권한 이창환은 1987년 제4회 쿠바 청소년 대회에 LF급으로 출전하면서 국제무대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해 7월에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LF급) 결승에서 캐나다 선수에게 1회 RSC로 패한다. 1989년 이창환은 '김승미 사단의 대표팀'에 입성하며 인도네시아 대통령 배에 출전해, 국제대회 첫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리고 대망의 1990년 4월 제16회 태국 킹스컵에서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 태국의 비차이 카드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은메달에 머문다.
양석진(왼쪽부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창환.
이창환은 그해 6월 제2회 서울컵대회에서 고교시절 2연패를 당한 조동범을 8강에서 만나 9ㅡ7로 승리한다. 그리고 4강에서 카드포를 다시 만나 16ㅡ6 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그리고 결승에서 신인 시절 2패를 당했던 한광형(상무)을 판정으로 잡고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실감 나는 이창환의 복싱 줄거리다.
이때 이창환은 필자에게 김승미 감독님의 외교력(?) 덕분에 서울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플라이급) 선발전에서 복싱 천재 한광형(상무)을 잡고 올라온 조동범(한국체대)과 맞대결한다. 그리고 판정승을 거둬 통산전적 2승2패 균형을 맞추면서 북경 아시안게임 본선에 진출한다.
대회 준결승에서 이창환은 중국의 류강을, 결승에서 파키스탄의 라티브를 차례로 제압하며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서울시립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창환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복싱을 내려놓는다.
이창환이 떠난 플라이급에서 그와 1승1패를 기록한 동양의 진주 바차이 카드포는, 1992년 제3회 서울컵대회에서 임덕민과 이해준을 연파하고 대회 최우수선수(MVP)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어진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도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 북한의 최철수를 꺾고 대망의 우승과 함께 2개 대회 연속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했다.
이창환은 일찍 복싱계를 떠난 사연에 대해, 17살 때 선수촌에 입성한 뒤 반복되는 선수촌 훈련에 염증과 권태감을 느껴 23살 젊은 나이에 복싱을 접었다고 회고했다.
90년 북경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이창환(왼쪽)이 상대 선수와 격돌하고 있다.
1990년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상한 이창환은 1993년 서울시청에 근무하면서 서울시 체육회 산하 22개 종목을 총괄하는 수석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창환은 자신의 리라공고 재학시절 은사인 황철순 감독을 자신이 근무하는 서울시청 감독으로 영입할 때 견인차(牽引車) 역할을 수행하며 지난날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창환의 복싱 스토리를 작성하면서 느낀 점은 김승연 협회장이 1983년 상비군제도를 마련하면서 한국대표팀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당시 국가대표 상비군 1진 20명을 태릉선수촌에 입촌시켜 훈련을 소화하고, 상비군 2·3진 21명은 선수촌 근처에서 여관을 얻어 합숙 훈련하는 상비군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이창환(왼쪽)과 김승미 대표팀 감독.
그리하여 수많은 복서들이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신준섭), 최초의 세계선수권 금메달(문성길), 최초의 월드컵 금메달(김광선), 최초의 아시안게임 12체급 전 체급 석권이라는 대기록이 작성됐다.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명의 한광형·조동범이 국가대표 에이스 김광선과 오광수를 꺾으며 파란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
그 중심에는 재임 기간 15년간 100억을 투자한 대한복싱협회 김승연 회장이 있었다.
이창환 역시 카드포 등 세계적 복서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같은 치열한 국내 복싱 경쟁 구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미래는 문이고 과거는 열쇠'라는 명언을 남겼다.
다시 말해 과거를 잊은 사회는 미래의 문 앞에서 길을 잃기 마련이란 뜻이다. 우리가 가진 열쇠는 오직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탄생한다는 점을 되새기면서 복싱 발전에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았으면 한다.
88서울올림픽을 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마추어 국가대표선수들이 대거 퇴진하자 한국 아마복싱 대표팀은 침체기를 맞이한다.
이때 한국의 막강 주먹에 눌려왔던 북한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복싱 유망주들이 경칩에 개구리 튀어나오듯 고개를 쳐든다.
북한의 이광식과 김덕남, 태국의 비차이 카드포와 사사쿨, 필리핀의 벨라스코 등 경량급 5명이 그 주인공이다. 이때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지도자가 68년 멕시코올림픽 대표 출신의 김승미 감독이다. 그때 그 시절 한국복싱 꿈나무들도 퇴진한 선배들 공백을 메우려고 하나둘씩 알을 깨고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이 중 대표적인 복서 한 명이 바로 이창환이다. 이창환은 1969년 2월3일 전남 화순 태생이다.
이창환은 유년(幼年)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고 성장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복서다.
그는 1983년 대동 중학 2학년 때 답십리에 위치한 한국화약체육관에서 황철순 감독의 지도로 복싱을 익혔다. 이곳에서 창환은 부모를 일찍 잃은 서러움과 안타까움을 샌드백을 두들기며 달랜다.
졸업반인 1984년, 이창환은 중등부 42 Kg '모스키토급'에서 그랜드 슬램(4관왕)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는다. 그 가운데 2개 대회는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발군(拔群)이었다.
1985년 창환은 황철순 감독이 이끄는 리라공고에 진학한다. 45Kg '코크급'으로 체급을 올린 그해 이창환은 박성춘(순천 금당고)·조동범(서울체고)의 두터운 벽에 막혀 내리 3연패를 당하며 진통을 겪는다.
박성춘 서울시복싱협회장(왼쪽)과 서울시 체육회 수석팀장 이창환.
수년 전 서울시 복싱협회장을 지낸 박성춘(한국체대)은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전인덕 (원주시청)에 1승1패, 아시안게임 금메달 양석진(동아대)에 2연승,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 조동범(한국체대)에 1패를 당한 엘리트 복서였다.
한편 1986년 리라 공고 2학년 때 전국대회 김명복배와 88꿈나무대회를 석권한 이창환은 1987년 제4회 쿠바 청소년 대회에 LF급으로 출전하면서 국제무대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해 7월에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LF급) 결승에서 캐나다 선수에게 1회 RSC로 패한다. 1989년 이창환은 '김승미 사단의 대표팀'에 입성하며 인도네시아 대통령 배에 출전해, 국제대회 첫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리고 대망의 1990년 4월 제16회 태국 킹스컵에서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 태국의 비차이 카드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은메달에 머문다.
양석진(왼쪽부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창환.
이창환은 그해 6월 제2회 서울컵대회에서 고교시절 2연패를 당한 조동범을 8강에서 만나 9ㅡ7로 승리한다. 그리고 4강에서 카드포를 다시 만나 16ㅡ6 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그리고 결승에서 신인 시절 2패를 당했던 한광형(상무)을 판정으로 잡고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실감 나는 이창환의 복싱 줄거리다.
이때 이창환은 필자에게 김승미 감독님의 외교력(?) 덕분에 서울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플라이급) 선발전에서 복싱 천재 한광형(상무)을 잡고 올라온 조동범(한국체대)과 맞대결한다. 그리고 판정승을 거둬 통산전적 2승2패 균형을 맞추면서 북경 아시안게임 본선에 진출한다.
대회 준결승에서 이창환은 중국의 류강을, 결승에서 파키스탄의 라티브를 차례로 제압하며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서울시립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창환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복싱을 내려놓는다.
이창환이 떠난 플라이급에서 그와 1승1패를 기록한 동양의 진주 바차이 카드포는, 1992년 제3회 서울컵대회에서 임덕민과 이해준을 연파하고 대회 최우수선수(MVP)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어진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도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 북한의 최철수를 꺾고 대망의 우승과 함께 2개 대회 연속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했다.
이창환은 일찍 복싱계를 떠난 사연에 대해, 17살 때 선수촌에 입성한 뒤 반복되는 선수촌 훈련에 염증과 권태감을 느껴 23살 젊은 나이에 복싱을 접었다고 회고했다.
90년 북경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이창환(왼쪽)이 상대 선수와 격돌하고 있다.
1990년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상한 이창환은 1993년 서울시청에 근무하면서 서울시 체육회 산하 22개 종목을 총괄하는 수석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창환은 자신의 리라공고 재학시절 은사인 황철순 감독을 자신이 근무하는 서울시청 감독으로 영입할 때 견인차(牽引車) 역할을 수행하며 지난날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창환의 복싱 스토리를 작성하면서 느낀 점은 김승연 협회장이 1983년 상비군제도를 마련하면서 한국대표팀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당시 국가대표 상비군 1진 20명을 태릉선수촌에 입촌시켜 훈련을 소화하고, 상비군 2·3진 21명은 선수촌 근처에서 여관을 얻어 합숙 훈련하는 상비군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이창환(왼쪽)과 김승미 대표팀 감독.
그리하여 수많은 복서들이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신준섭), 최초의 세계선수권 금메달(문성길), 최초의 월드컵 금메달(김광선), 최초의 아시안게임 12체급 전 체급 석권이라는 대기록이 작성됐다.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명의 한광형·조동범이 국가대표 에이스 김광선과 오광수를 꺾으며 파란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
그 중심에는 재임 기간 15년간 100억을 투자한 대한복싱협회 김승연 회장이 있었다.
이창환 역시 카드포 등 세계적 복서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같은 치열한 국내 복싱 경쟁 구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미래는 문이고 과거는 열쇠'라는 명언을 남겼다.
다시 말해 과거를 잊은 사회는 미래의 문 앞에서 길을 잃기 마련이란 뜻이다. 우리가 가진 열쇠는 오직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탄생한다는 점을 되새기면서 복싱 발전에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았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