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숙적’ 최충일과의 혈투 딛고 MVP 등극한 김인창…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화천행

26.01.22 40

본문

-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신 ‘골든컵’ 금메달로 한(恨) 풀어

- 송순천 이후 24년 만에 복싱인으로 대한체육회 MVP 선정된 전설


- 18년 덕소 생활 정리하고 고향 강원도 화천서 ‘청소년 캠핑장’ 운영

얼마 전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에서 18년간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써온 김인창 관장이 정든 체육관 문을 닫았다.


그는 이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강원도 화천으로 떠난다.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 복싱계를 풍미했던 국가대표 김인창의 복싱 스토리를 이번 주 스포츠 칼럼의 주제로 선정했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다웠던 한영고의 왼손잡이

1957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김인창은 1974년 복싱 명문 한영고에 입학했다. 고교 초년생 시절에는 이재훈, 김창석 등 당대 강자들에게 패하며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앞둔 1976년, 그의 잠재력이 폭발했다. 학생선수권과 대통령배 페더급을 잇달아 석권하며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그해 10월 부산에서 열린 제57회 전국체전. 3관왕을 노리던 김인창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부산 대표이자 ‘천재 복서’로 불리던 최충일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최충일은 몬트리올 올림픽 8강에 진출했던 고교생 국가대표로, 객관적 전력에서 김인창의 열세가 예상됐다. 하지만 실제 경기는 창과 방패의 대결처럼 팽팽했다.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1대 4 판정패를 당했지만, 당시 복싱협회 김택수 회장은 김인창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즉시 태릉선수촌 입촌을 명령했다.

숙적과의 2연패, 그리고 세계 7위로의 도약

1977년 한국체대 창설 멤버로 입학한 김인창은 대학 선수권에서 다시 최충일과 맞붙었으나 또다시 초박빙 끝에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시련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라이트웰터급 대표로 선발된 그는 본선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79년 영원한 라이벌 최충일이 프로로 전향해 파죽의 KO 승을 거두는 동안, 김인창은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했다. 대통령배 2연패와 제1회 뉴욕 월드컵 출전을 통해 AIBA 세계랭킹 7위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적인 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올림픽 보이콧의 한(恨), ‘골든컵’ 금메달로 씻다

김인창의 복싱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80년이었다. 모스크바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19세의 천재 복서 김동길을 꺾고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으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서방 국가들의 보이콧으로 출전이 무산됐다.



실망감도 잠시, 그는 보이콧 국가 75개국이 모여 케냐에서 개최한 ‘골든컵’ 대회에 출전했다. 1회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인 미국의 조 맨리를 꺾는 등 파죽의 4연승을 질주하며 한국 팀의 유일한 금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한 울분을 실력으로 증명한 셈이다.

야구 최동원·양궁 김진호 제치고 MVP 등극… 전설의 퇴장

1981년 2월, 김인창은 선수 생활의 정점을 찍는다. 대한체육회가 선정하는 최우수선수(MVP) 시상에서 양궁의 김진호, 야구의 최동원, 배구의 장윤창 등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당당히 왕좌에 올랐다. 이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송순천 이후 무려 24년 만에 복싱인이 거둔 위대한 금자탑이었다.




이 대회를 끝으로 링을 떠난 김인창은 지도자의 길을 걷다 이제는 고향 화천으로 돌아간다. 오는 4월 1일 자로 화천군 청소년 캠핑장의 대표로 부임하는 그는 7,000평 규모의 야영장을 기반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와 청소년 육성에 마지막 열정을 쏟을 예정이다.

일흔을 목전에 둔 복싱 스타 김인창. 상대를 존중할 줄 알았던 겸손한 챔피언이 링 밖에서 펼쳐갈 새로운 ‘라운드’에 복싱인들과 팬들의 뜨거운 응원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