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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한국 아마복싱계 '최대의 별' 김동길 영면하다

25.10.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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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1980년대 아마복싱계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한 천재 복서 김동길이 하늘의 별이 됐다.

김동길은 2021년 2월 전남대병원에서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비인두암이란 희귀암(稀貴癌) 판정을 받고, 4년8개월간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투병 생활을 해왔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타계했다.

필자와 김동길의 첫 인연은 1985년 어느날 영등포 88체육관에서 시작되었다. 김동길이 포함된 아마추어 국가대표 선수들과 프로 복서들의 공개 스파링이 필자가 소속된 88체육관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당시 김동길의 파트너는 한국 웰터급 챔피언 정영길. 이 스파링에서 김동길을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수준 높은 복싱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발레리나 같은 율동적인 스텝에서 뿜어내는 다채로운 연타는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왼손잡이 복서 김동길은 1961년 5월9일 전남 담양 출생으로, 1977년 광주체육관(이재인 관장)에서 복싱을 수학한다. 그는 천부적인 복싱 재능으로 광주 제일중 졸업반인 1978년 6월 제2회 김명복배 페더급 결승에서 김종훈(인천 금강체)에 1회 RSC승을 거두고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다.

1979년 전남체고에 입학한 초(超)고교급 복서 김동길은 1980년 1월 모스크바 올림픽 (라이트급) 선발전에서 황정한을 꺾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그러나 최종 선발전에서 에베레스트산보다 더높은 김인창(한국체대)의 장벽에 막혀 2연속 판정패하며 출전권을 잃는다. 이 패배를 디딤돌 삼아 김동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1980년 1월 제 3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 처녀 출전한 이래 1983년 4월 제9회 킹스컵대회까지 3년3개월 동안 무려 14차례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한국 아마 복싱사에 지울 수 없는 화려한 족적(금메달 8개, 은메달 4개, 동매달 1개)을 남겼다.

그러나 심신의 피로감이 임계점(臨界點)에 달한 김동길은 결국 제풀에 쓰러진다.

김동길은 종합 신체검사에서 양성 바이러스성 간염(肝炎)에 걸려, 뜨거운 링 대신 차가운 병실에 눕고 말았던 것이다. LA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불상사가 일어나자 대한체육회 정주영 회장까지 병실을 방문해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위로할 정도로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시 김동길은 양궁의 김수녕과 함께 이번 LA 올림픽의 강력한 금메달 원투펀치였다. 다행스럽게 김동길은 1984년 2월, 10개월 만에 병마를 털어내고 링에 컴백해 LA 올림픽 최종 선발전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국내 최고의 왼손잡이 복서 킬러 고희룡 (웅비)이었다.

이대결에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고희룡에 3ㅡ2 판정승을 거두고 본선 출전권을 획득한다. 그해 8월 LA 올림픽 LW급에 출전한 김동길은 예상대로 순항을 거듭하면서 8강에 진출한다.



8강전 상대는 범 미주 올림픽이라 불리는 팬 아메리카대회 우승자 미국의 제리 페이지. 이 대결에서 김동길은 압도적인 화력을 품어내며 주도권을 잡았지만 1ㅡ4 엉터리 판정에 고개를 숙였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김동길이 우세한 경기를 펼쳤는데 이해할 수 없는 판정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LW급 준우승은 태국의 움포론이 차지했는데 움포론은 2차례 김동길에게 패한 선수였다.

올림픽이 끝나고 김승연 복싱협회 회장은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개최된 복싱인의 밤 행사에 김동길을 불러 88올림픽 때까지 동장에 해당 하는 30만원을 매월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김동길은 1986년 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전무후무한 9체급 우승을 차지하고 링을 떠난다. 3대 메이저 대회(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에서 금메달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 퇴장한 것이다.

김동길은 8년전 필자와 담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경기를 1983년 5월 서독 뮌헨에서 열린 제3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꼽았다. 당시 LW급 결승에서 김동길은 세계랭킹 1위 쿠바의 카를로스 가르시아와의 대결에서 팽팽한 접전 끝에 판정패를 당했다.

하지만 복싱 관계자들로부터 이 대회 최고의 명승부라는 격찬을 들었다. 1987년 김동길은 서울체고 강사로 입성해 학생들을 조련하였다.

이듬해 광주광역시로 옮겨 교사로 일하며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을 겸직하며 활약했다. 1992년 용산공고 코치로 재직 중인 필자와 학생선수권대회가 벌어진 잠실 학생 실내체육관에서 재회하였다.

그때 경기장에서 만난 김동길은 필자에게 따스한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 김동길은 따스하고 다정다감한 선배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필자에겐 친동생처럼 잘 대해주었다.




2019년 3월 한국체대 7회 졸업생 허영모가 위암으로 사망 이후 지난 5~6월에 한국체대 4회 졸업생 김창덕, 박기철과 5회 졸업생 신귀항에 이어 6회 졸업생 김동길마저 타계하면서 6년 동안 한국체대 졸업생 5명이 순차적으로 소천하였다.

생전에 김동길은 투병 기간이 길어짐에 따른 안타까운 심정을 필자에게 자주 피력(披瀝)하였다. 자신과 1981년 킹스컵대회 결승전에서 맞대결하며 호적수였던 호계천 (수경사)을 떠올리며 스트레이트 품질이 우수한 복서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동길은 사망하기 열흘 전 필자에게 복싱에 관한 좋은 글을 써주어 선배로써 자랑스럽다고 격려를 해주었는데, 그 말이 필자에게 생전에 남긴 유언(遺言)이 되고 말았다.

7년간 아마추어 국가대표 생활을 하면서 3체급에 걸쳐 국가대표로 뽑힌 김동길은 국내 경기에서 단 5패 (곽동성, 김태주, 정용범, 김인창) 만을 기록한 퍼펙트 복서였다. 한국 아마 복싱사상 불멸의 기록인 9차례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한 위대한 복서 김동길, 이제 모든 고통 내려놓고 편안하게 영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