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지켜본 개그계의 '살아있는 전설' 전유성 선생
2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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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난 25일 타계한 전유성 선생의 장례식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오래전 그분과 맺은 짧은 인연을 통해 보고 느꼈던 감정을 이번 주 칼럼에 담아 볼까한다.
1998년 5월 어느날 당시 서울체고 2년차 코치였던 필자에게 전유성 선생이 찾아왔다. 어떻게 오셨냐고 묻자 그는 88 서울올림픽 복싱 금메달 김광선의 소개로 왔다고 했다.
방문 목적은 슈퍼모델 선발전에 출전할 이명주라는 여고생에게 한 달만 복싱 수련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부터 이명주 학생이 운동을 마치면 전유성 선생과 격일(隔日)로 식사하면서 많은 담화를 나눴다.
그때 필자는 전유성 선생이 책을 읽으면서 연필로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공감(共感)했다. 왜냐면 필자도 기억하는 천재보다 기록하는 둔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 후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김광선의 복싱 체육관 개관식이 열렸다.
필자(좌측)와 전유성 선생
이때 필자는 현장에서 전유성 선생을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개관식 장면을 지켜보았다. 잠 시후 전유성 선생이 "조 코치 애기 몇 살 이야"라고 물었다. 3살이라고 답하자, 전 선생 특유의 목소리로 "좀만하군"이라고 말해 주변에서 폭소(爆笑)가 터졌다. 개관식이 끝나고 필자가 자택으로 돌아갈 때 전유성 선생은 필자에게 택시비 20만원을 챙겨주셨다.
당시 전유성 선생은 1995년 인사동에 '학교 종이 땡땡땡'이라는 카페를 열면서, 새로운 유형의 전통 카페를 개척하느라 분주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마지막 4주 차에 5년 전 결혼한 전유성 진미령 부부가 서울체고에 동반 출근했다. 당시 40세의 진미령 여사는 평소에 운동을 꾸준히 했는지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얼마 후 약속된 4주간에 걸친 훈련이 모두 끝나고 전유성과 필자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편의상 존칭은 생략한다)
심영자 회장(왼쪽)과 가도현 레드 펌킨 대표.
며칠 후 슈퍼모델에 출전했던 이명주양이 탈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다음날 전유성이 필자를 찾아왔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하면서 현찰 50만원과 양주 한 병을 전달하고 떠났다.
당시 서울체고 강사 월급이 65만 원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액수였다. 그렇게 25년의 세월이 흐른 2023년 어느날 필자는 전유성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전화상으로 해후(邂逅)했다.
전유성과 필자는 서울체고 시절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전유성은 역시 특유의 음색으로 "그때 광선이 소개로 만나 미령(진미령)이도 함께 갔었지"하면서 4반세기 전 추억을 회상했다. 전유성과 뜻깊은 인연의 징검다리를 연결한 다른 한 주인공은 현재 개그맨 소극장 대표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포함해 멀티 사업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복서 출신 가도현이었다.
신준섭 챔프(왼쪽)와 전유성 선생.
1972년 충남 광천 태생의 가도현은 전직 프로 복서 출신으로 8승(6KO) 3패의 기록으로 KBC J.페더급 타이틀전 도전 경험을 가진 중견 복서였다. 2017년 4월 회식 자리에서 심영자 전(前) 88 프로모션 회장에게 가도현 대표를 인사시켰다.
심 회장은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를 사전에 감지한 그는 쇠잔한 모습의 심 회장에게 30만원을 드렸다. 그 무렵 심회장이 필자에게 복싱경기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가도현은 자신의 승용차로 심 회장님을 모시고 관악산에 위치한 SM 10관(대표 홍성민)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열린 KBF 신인왕전을 관전할 수 있게 도우미 역활을 자처했다.
2023년 어느날 이런 이력을 보유한 가도현 대표를 통해 전유성의 연락처를 받아 냈다. 그때부터 필자는 전유성과 가끔씩 통화하면서 지난 추억을 공유하였다. 언젠가 심영자 회장과 가도현 대표가 함께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전유성에게 보내드렸다.
카톡을 확인한 전유성은 필자에게 심 회장 연락처를 물으셨다. 2020년 10월에 타계하셨다고 전하자 "그분(심영자 회장)이 살아계셨다면 생활비라도 보내드릴려고 했는데"라면서 애도(哀悼)를 표했다.
전유성은 심 회장이 30년전 큰 행사를 치를 때 본인이 직접 사회를 보면서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언젠가 가도현 대표가 "형님 전유성 선생님이 계신 남원으로 한번 내려가시죠"하면서 며칠 뒤로 날을 잡았다.
그러나 그날은 평일이라 체육관 운영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최근에 건강이 좋지 않다는 기사가 언론에 뜨자 필자가 SM 홍성민 대표에게 한번 가도현 대표와 같이 내려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로 역시 실행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필자는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복싱 칼럼을 꾸준히 보내드렸다. 특히 마지막으로 보낸 때가 소천하시기 5일 전으로, 복서 김성남을 주제로 한 칼럼이었다.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도 불구하고 송출한 칼럼이 클릭된 것을 확인하면서 왠지 마음이 숙연해졌다.
올 3월에 미국에 있는 신준섭 챔프가 지난날 전유성과 남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필자는 곧바로 전유성에게 그 사진을 전송(電送)했다.
송출된 신준섭의 사진을 받은 전유성이, 사진 밑에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신준섭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짧은 글귀에서 그분의 복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각설하고 수개월 전부터 기력이 쇠잔한 모습으로 TV 화면에 잡힌 전유성을 보면서 그분의 건강이 크게 염려됐다.
또한 1949년에 태어난 방송계 연예계 큰 별들이 한 분씩 수년 전부터 순차적으로 타계하는 기이(奇異)한 현상을 보면서 '다음 차례는 전유성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허구연과 쌍벽을 이룬 야구 해설가 하일성, 국민 MC 허참, 톱 탤런트 김수미, 인기가수 들고양이(임종임) 등이 모두 호적상 전유성과 같은 1949년생 동년배들이었다. 올 3월에 하늘에 별이 된 세계 헤비급 챔피언 조지 포먼도 1949년생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유성도 49년생 징크스를 깨지 못하고 9월25일 결국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 살 어린 1950년생 MC 임성훈, 복싱 챔피언 홍수환, 가수 조용필이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찹찹하다. 전유성 선생의 묘비명에 <웃지마 너도 곧 와>라는 유언이 새겨졌다 한다.
그분은 신앙(信仰)과 거리가 먼 분이다. 하지만 평소 타인들에게 수많은 은덕(隱德)을 베풀었다. 이 공로를 하늘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본 신의 영도(領導)에 따라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유성 선생님 편히 영면하소서.
1998년 5월 어느날 당시 서울체고 2년차 코치였던 필자에게 전유성 선생이 찾아왔다. 어떻게 오셨냐고 묻자 그는 88 서울올림픽 복싱 금메달 김광선의 소개로 왔다고 했다.
방문 목적은 슈퍼모델 선발전에 출전할 이명주라는 여고생에게 한 달만 복싱 수련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부터 이명주 학생이 운동을 마치면 전유성 선생과 격일(隔日)로 식사하면서 많은 담화를 나눴다.
그때 필자는 전유성 선생이 책을 읽으면서 연필로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공감(共感)했다. 왜냐면 필자도 기억하는 천재보다 기록하는 둔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 후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김광선의 복싱 체육관 개관식이 열렸다.
필자(좌측)와 전유성 선생
이때 필자는 현장에서 전유성 선생을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개관식 장면을 지켜보았다. 잠 시후 전유성 선생이 "조 코치 애기 몇 살 이야"라고 물었다. 3살이라고 답하자, 전 선생 특유의 목소리로 "좀만하군"이라고 말해 주변에서 폭소(爆笑)가 터졌다. 개관식이 끝나고 필자가 자택으로 돌아갈 때 전유성 선생은 필자에게 택시비 20만원을 챙겨주셨다.
당시 전유성 선생은 1995년 인사동에 '학교 종이 땡땡땡'이라는 카페를 열면서, 새로운 유형의 전통 카페를 개척하느라 분주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마지막 4주 차에 5년 전 결혼한 전유성 진미령 부부가 서울체고에 동반 출근했다. 당시 40세의 진미령 여사는 평소에 운동을 꾸준히 했는지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얼마 후 약속된 4주간에 걸친 훈련이 모두 끝나고 전유성과 필자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편의상 존칭은 생략한다)
심영자 회장(왼쪽)과 가도현 레드 펌킨 대표.
며칠 후 슈퍼모델에 출전했던 이명주양이 탈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다음날 전유성이 필자를 찾아왔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하면서 현찰 50만원과 양주 한 병을 전달하고 떠났다.
당시 서울체고 강사 월급이 65만 원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액수였다. 그렇게 25년의 세월이 흐른 2023년 어느날 필자는 전유성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전화상으로 해후(邂逅)했다.
전유성과 필자는 서울체고 시절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전유성은 역시 특유의 음색으로 "그때 광선이 소개로 만나 미령(진미령)이도 함께 갔었지"하면서 4반세기 전 추억을 회상했다. 전유성과 뜻깊은 인연의 징검다리를 연결한 다른 한 주인공은 현재 개그맨 소극장 대표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포함해 멀티 사업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복서 출신 가도현이었다.
신준섭 챔프(왼쪽)와 전유성 선생.
1972년 충남 광천 태생의 가도현은 전직 프로 복서 출신으로 8승(6KO) 3패의 기록으로 KBC J.페더급 타이틀전 도전 경험을 가진 중견 복서였다. 2017년 4월 회식 자리에서 심영자 전(前) 88 프로모션 회장에게 가도현 대표를 인사시켰다.
심 회장은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를 사전에 감지한 그는 쇠잔한 모습의 심 회장에게 30만원을 드렸다. 그 무렵 심회장이 필자에게 복싱경기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가도현은 자신의 승용차로 심 회장님을 모시고 관악산에 위치한 SM 10관(대표 홍성민)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열린 KBF 신인왕전을 관전할 수 있게 도우미 역활을 자처했다.
2023년 어느날 이런 이력을 보유한 가도현 대표를 통해 전유성의 연락처를 받아 냈다. 그때부터 필자는 전유성과 가끔씩 통화하면서 지난 추억을 공유하였다. 언젠가 심영자 회장과 가도현 대표가 함께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전유성에게 보내드렸다.
카톡을 확인한 전유성은 필자에게 심 회장 연락처를 물으셨다. 2020년 10월에 타계하셨다고 전하자 "그분(심영자 회장)이 살아계셨다면 생활비라도 보내드릴려고 했는데"라면서 애도(哀悼)를 표했다.
전유성은 심 회장이 30년전 큰 행사를 치를 때 본인이 직접 사회를 보면서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언젠가 가도현 대표가 "형님 전유성 선생님이 계신 남원으로 한번 내려가시죠"하면서 며칠 뒤로 날을 잡았다.
그러나 그날은 평일이라 체육관 운영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최근에 건강이 좋지 않다는 기사가 언론에 뜨자 필자가 SM 홍성민 대표에게 한번 가도현 대표와 같이 내려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로 역시 실행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필자는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복싱 칼럼을 꾸준히 보내드렸다. 특히 마지막으로 보낸 때가 소천하시기 5일 전으로, 복서 김성남을 주제로 한 칼럼이었다.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도 불구하고 송출한 칼럼이 클릭된 것을 확인하면서 왠지 마음이 숙연해졌다.
올 3월에 미국에 있는 신준섭 챔프가 지난날 전유성과 남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필자는 곧바로 전유성에게 그 사진을 전송(電送)했다.
송출된 신준섭의 사진을 받은 전유성이, 사진 밑에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신준섭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짧은 글귀에서 그분의 복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각설하고 수개월 전부터 기력이 쇠잔한 모습으로 TV 화면에 잡힌 전유성을 보면서 그분의 건강이 크게 염려됐다.
또한 1949년에 태어난 방송계 연예계 큰 별들이 한 분씩 수년 전부터 순차적으로 타계하는 기이(奇異)한 현상을 보면서 '다음 차례는 전유성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허구연과 쌍벽을 이룬 야구 해설가 하일성, 국민 MC 허참, 톱 탤런트 김수미, 인기가수 들고양이(임종임) 등이 모두 호적상 전유성과 같은 1949년생 동년배들이었다. 올 3월에 하늘에 별이 된 세계 헤비급 챔피언 조지 포먼도 1949년생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유성도 49년생 징크스를 깨지 못하고 9월25일 결국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 살 어린 1950년생 MC 임성훈, 복싱 챔피언 홍수환, 가수 조용필이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찹찹하다. 전유성 선생의 묘비명에 <웃지마 너도 곧 와>라는 유언이 새겨졌다 한다.
그분은 신앙(信仰)과 거리가 먼 분이다. 하지만 평소 타인들에게 수많은 은덕(隱德)을 베풀었다. 이 공로를 하늘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본 신의 영도(領導)에 따라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유성 선생님 편히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