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소년등과·장원급제한 복싱 국가대표 송광식의 인생 유전

25.09.25 37

본문

지난 주말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야외무대에서 7백명의 선수가 출전한 가운데 생활 체육대회가 개최됐다. 필자는 이대회를 주최 주관한 시흥시 복싱협회 송광식 체육회 감독의 요청을 받아 참석했다.

행사장에서 대한 복싱협회 이용장 심판위원과 이흥수 경기도 복싱협회 심판위원장을 만났다. 1960년 전주태생의 이용장은 1978년 전국체전 선발전(밴텀급)에서 예상을 뒤엎고 킹스컵 대표 출신의 곽동성(원광대)을 판정으로 꺾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대이변을 연출했다.

그러나 최종전에서 곽동성에 패하면서 1승1패의 균형을 맞추었다. 곽동성은 국제대회 7관왕 위업을 달성한 슈퍼스타 황철순을 꺾은 복서였다.

이듬해인 1979년 제6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전북 대표로 출전한 이용장은 청소년 대표출신의 김평국(경남대표)을 판정으로 잡고 감격적인 금메달을 획득했다.


고교 1학년때 국가대표로 발탁된 송광식.

1954년 경북 의성 출신의 이흥수 위원장은 서울체고 강사 시절 제37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기록적인 6체급을 석권하는 불멸(不滅)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이후 상무팀 지도자로 변신한 이흥수 감독은 1991년 동아시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상무팀이 12체급중 8체급을 석권하는 성과를 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복싱 역사상 최초로 3회 연속 올림픽대표팀 코칭스탭으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이번주 컬럼의 주인공 송광식은 1964년 3월16일 대전 출신이다. 유소년기에 태권도에 심취해 4단의 검은띠를 맨 송광식은, 100m를 11초 7에 주파하는 총알 같은 스피드와 순발력을 바탕으로 1981년 한밭체육관(이수남 관장)에 입관한다.

1982년 뒤늦게 청운실고에 입학한 송광식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충배 선생의 조련을 받으며 한뼘씩 성장한다.


국제대회에 출전한 이성목(왼쪽부터), 고희룡, 송광식.

그해 3월 전국 학생 신인대회에 출전(페더급)해 4연승(3KO)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한 그는, 11개월이 지난 1983년 2월 17세 나이에 성인 무대인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 겁 없이 출전한다. 송광식은 4강에서 치악산 호랑이 신창석(경희대)과 대결한다.

22세의 신창석은 1981년 5월 제1회 마르코스배 (필리핀) 대회에서 국내에서 2번째로 쿠바 선수(에차베리아)를 5ㅡ0 으로 꺾어 주목을 받은 선수다.

또한 그는 홍동식, 권채오, 문성길, 박형옥을 차례로 제압하며 국내 최초로 4체급에서 국가대표를 지냈다. 여기에 그치지않고 신창석은 돌주먹 문성길과 2연전을 펼쳐 1승1패를 기록하면서 한차례의 다운도 허용하지 않은 바위처럼 단단한 내구력을 지닌 복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17세 소년 송광식은 금강불괴(金剛不壞)처럼 단단한 신창석을 상대로 공이 울린지 불과 110초만에 속사포 연타로 RSC승을 거두며 대회 최대의 이변을 창출했다.


1990년 8월 필리핀의 페르난드를 KO시킨 송광식.

 송광식은 결승전에서도 권길문(목포대)과 맞대결해 3회 2분12초만에 KO승을 거두고 17세 11개월 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소년등과(少年登科)에 성공한다.

혜성(彗星)처럼 나타난 송광식은 3월에 열린 킹스컵 국제대회에 처녀 출전해 홈 텃세로 억울하게 8강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수준높은 경기력을 발휘한 송광식은 국제 복싱 연맹 (AIBA)에 의해 기량을 인정받아 그해 5월 세계 선수권 도전자대회에 정용범, 신준섭, 이성목과 함께 발탁돼 출전한다.

이 대회는 국제 아마복싱연맹(AIBA)이 세계 선수권자와 랭킹이 높은 유망주(송광식)를 대결시켜 새로운 선수권자를 뽑는 대회였다.

세계의 높은 벽에 고개를 숙인 송광식은 1983년 12월 어느날 서울 도봉구 공릉동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태릉선수촌을 탈출한다.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 산등성이에 빼곡한 헐벗은 나무 사이로 송광식은 야음을 틈타 선수촌을 벗어났다.

호랑이처럼 불같은 성격의 그가 울타리에 갇혀(?) 고립된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곧 바로 전열을 추스르고 출전한 1984년 2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 출전한 송광식은 1회전에 강력한 우승후보 줌타이(소련)을 판정으로 꺾었다. 그리고 8강전에서 일본의 스나가와를 스트레이트 한방으로 1회 2분47초만에 KO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벌어진 LA 올림픽 1차 선발 결승전(라이트급)에서 1983년 로마 월드컵 은메달리스트 전칠성(목포대)과 맞붙는다. 이대결에서 송광식은 특유의 강펀치로 전칠성을 2차례 휘청거리게 하는 등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안타깝게 그를 외면했다.

1985년 66회 전국체전에 충남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한 송광식은, 그해 12월 39회 전국 선수권 대회 4강에서도 1984년 김명복배 최우수복서(MVP) 원점도(홍익대)를 2회에 원 펀치로 날려버렸다. 결승에서 훗날 88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이강석(한국체대)을 역시 5ㅡ0 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독산타이거 임현우(왼쪽)와 SM복싱 김시후.

1986년 상무에 입대한 송광식은 그해 아시안게임 최종 결승(라이트급)에서 노련한 권현규(목포대)의 페이스에 말려 판정패하며 출전권을 상실한다.

송광식은 이후 웰터급으로 체급을 올려 그 해 8월 제16회 대통령배 대회 준결승에서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송경섭(한국체대)을 판정으로 꺾었다. 결승에서도 송형동(한국체대)을 2회 RSC로 잡고 우승을 차지한다.

1987년 2월 제 10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서 소련 선수에게 패해 동메달을 획득한 송광식은 이후 88서울올림픽 웰터급 1차 선발전에서도 우승했다.

그러나 송광식은 최종선발전에서 송경섭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면서 출전권을 상실한다. 송광식은 5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하면서 98전 85승(69KO·RSC) 13패의 기록을 뒤로하고 1988년 7월 88체육관 소속으로 프로에 전향한다.

 88체육관에 오기 전 동아체육관 김현치 회장이 그의 스파링을 지켜본 뒤 송광식의 기량이 고 김득구 선수보다 한 단계 높다고 평하면서 계약금 3천만원을 제시했다. 하지만 은사이신 김충배 선생의 뜻을 받아들여 88체육관행이 이뤄지게 되었다.

88프로모션에 입성한 그는 김상현 관장의 지도로 국내 챔피언에 오르며 11연승(6KO)을 기록했다. 그러나 세계 랭킹전 같은 속칭 영양가 없는 경기가 반복되자 의욕을 상실한 송광식은 1993년 3월 나지로프와 동양 타이틀을 끝으로 링을 떠난다.

은퇴 후 송광식은 특유의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 기질이 꿈틀거리면서 오랫동안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며 방황한다. 그러던 2010년 어느날 송광식은 우연한 계기로 오랜 방랑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경기도 시흥에 정착해 체육관을 운영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평강공주 같은 아내를 만나 30평대 APT를 장만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는다. 체육관을 성실하게 운영하면서 지내던 어느날 송광식은 치과의사 권준상 원장과 인연이 되면서 그분을 주축으로 시흥시 복싱협회 복사모( 복싱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를 탄생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복사모 회원은 현재는 30명으로 크게 늘었다. 권준상 복사모 회장을 중심축(태양)으로 30여개의 행성(복사모 회원)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이번 대회도 성대하게 잘 치뤘다.

5시간에 걸쳐 치러진 이번 대회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독산 타이거 임현우 선수와 SM 복싱 김시후 선수의 경기였다. 특히 독산 타이거 임현우 선수의 과감한 공격력이 돋보인 한판이었다.

누구나 경기에서 패할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길 때 보다 패할 때 산 경험을 많이 체득한다는 사실이다.


전준상 자문위원(왼쪽)과 송광식 고문.

필자도 고교 2학년 때 전국대회 8강에서 3차례 탈락했다. 그러나 졸업반이 되자 전국대회에 5차례 출전해 모두 입상했다. 치명적인 3패가 밑거름이 돼 탄생한 결과물이다.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가 1982년 9월18일 사파타와 벌인 1차전 세계 타이틀전 패배를 디딤돌 삼아 기록적인 15차 방어에 성공한 것도 같은 맥락(脈絡)이다.

각설하고 매년 필자가 시흥시에서 해마다 치러지는 행사에 한두 차례씩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송광식 감독 주변에 좋은 분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음을 유추(類推)해 볼 때 아내인 평강공주의 올곧은 가르침을 받은 송광식 감독이 낮은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온달장군으로 재탄생한 것 같다.

작금(昨今)의 송광식은 주위 분들의 사랑과 애정을 듬뿍 받으며 인생 3막을 안정되게 지내고 있다. 권준상 회장을 중심으로 시흥시 복싱협회 복사모 회원들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 하길 바라면서 이번주 컬럼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