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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 출신' 의로운 독지가 서북 스카이산업 신 두홍 회장

25.09.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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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오후 복싱 선배 한 분이 일과를 마치고 작업복 차림으로 체



육관을 방문했다. 주인공은 서북 스카이 산업 대표 신두홍 회장이었다.


지난주 토요일 체육관을 방문한 서북 스카이 산업 대표 신두홍 회장

신두홍 회장은 1948년 전북 남원 출신으로 유년기에 상경 1966년 남산 공



전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는 배구선수였지만 이듬해 복싱으로 전환 민관



식 대한체육회장이 1965년 설립하고 채용석 관장이 지휘봉을 잡은 중산체



육관에서 복싱을 수학한다.



1년 6개월 후에 벌어진 1968년 학생선수권 (페더급) 에서 출전한 신두홍



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중산체육관을 설립한 민관식 회장은 1964년 대한체



육회장에 취임, 1971년까지 한국체육계를 선도 근대 체육의 아버지라 불

린 분이다.



1971년 테헤란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LF급 이석운 B급의 고생근 W급의 정영근등 3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중요한 사실은 3체급 금메달의 주인공이 모두 중산체육관 소속의 선수들이었다는 점이다.

신두홍은 중산체육관을 대표하는 면돗날 복서라 불린 고생근의 전문 스파링 파트너였다. 1969년 제1회 아시아 청소년대회(일본) 플라이급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을 받은 고생근은 그해 대한체육회에서 선정한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농구의 신동파(기업은행)에 이어 우수선수로 뽑힌 톱 복서다.



1972년 뮌헨 올림픽(밴텀급) 대표 출신의 고생근의 섬광(閃光)처럼 터지는 스트레이트를 신두홍은 칼날 같다는 직유법을 사용할 정도로 날카로웠다고 표현했다.

아마츄어 시절 100승(11패)을 기록한 고생근은 최근 건강이 악화되어 안타깝게 연락이 두절 되었다. 신 회장은 필자에게 수소문(搜所聞)해서 고생근의 연락처가 확인되면 소식을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대화 중에 신 회장은 중산 체육관출신 WBA 슈퍼 미들급 백인철 챔프가 보고 싶다고 말해 필자가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도착한 백인철 챔프와 만찬을 함께 하면서 담화를 나누었다.



필자가 신두홍 회장을 처음으로 알게된 것은 2020년 7월 4일 세검정에서 펼쳐진 WBA 밴텀급 홍수환 챔프 타이틀 획득 46주년 기념식에서 평소 일고 지내던 황해남 나라건설 소장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신두홍과 수어지교(水魚之交) 관계인 한양대 공대 출신의 황해남은 1954년 충남 예산 출신으로 1973년 제26회 전국 선수권 페더급 결승에서 이흥수(성동체육관)에 판정패 준우승을 차지한 복서였다.

여담이지만 학사복서 황해남의 자식 농사는 대풍년이다. 맏딸 황희연은 한서대학교 항공운항과를 졸업 현재 대한항공 2천500명 조종사중 단 10명에 불과한 여성 조종사로 활동중이다.

둘째딸 황희선은 2008년 열린 황토 아가씨 선발전에서 진(眞)에 선발되어 수년 동안 예산 홍보대사로 활동한 자랑스런 딸들이다.



한편 복싱을 접은 신두홍 회장은 1978년 3월 덤프 트럭기사로 열사(熱砂)의 나라 이란에 진출 팔레비 정권에서 4년을 다시 리비아로 진출 역시 덤프 트럭을 몰면서 카디피 정권하에서 2년을 보내고, 1985년 그가 귀국했을 때 6천만 원의 종자돈(Seed Money) 을 모았다.

1990년 신두홍 일가족 6명 전원이 1년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회전초밥 만드는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習得)한다. 귀국한 신두홍 일가는 일본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기술을 토대로 보증금 4억을 투입 압구정동에 <회전 초밥집>을 국내 최초로 설립한다.

경쟁자 없는 이분야에서 그야말로 독주에 독주를 거듭 천문학적인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러 그는 8층짜리 건물을 매입했다.

이는 신두홍 회장이 복싱에서 체득한 불퇴전(不退轉)의 도전정신을 발휘했기에 알찬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인생이란 용기 있게 방망이를 휘둘러야 홈런을 때리든 삼진을 당하든 결과물이 창출되는 법이다.

신 회장은 현재는 서북 스카이 연합이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팔순을 목전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필자가 가까이서 지켜본 신두홍은 근검절약이 생활화되어 돈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신 회장도 중산체육관에서 동문수학한 70년 방콕아시안게임(웰터급) 금메달 정영근 관장이 오래전 중화동에 체육관을 오픈할 때 인테리어비로 5백만 원을 쾌척했다. 또한 현재 투병중인 정영근 관장 자택을 수시로 방문 병원비를 지급하는 선행을 베풀고 있다.

필자에게도 지난 5월 조철제 회장 구순 잔치에 의미 있게 써 달라고 30만원을 전달 이에 필자는 14온스 글러브 1개와 싸인용 글러브 13개를 구입 조철제 회장 구순 잔치에 참석한 방문객들에게 전달했다.

남산 공전을 나온 신두홍 화장은 한양대 공대를 나온 황해남 소장보다 경제력에서 만큼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신두홍은 인생에서 경제력은 학력순(學歷順)이 아님을 증명한 산증인이다. 언젠가 신두홍 회장과 함께 KBA 생활체육 경기장에 참가 WBA 국제심판 김병무 심판을 소개시켜 주었다.


1959년 함평 출신의 김병무 심판은 복싱판에서 신두홍 회장처럼 나눔과 베품을 몸소 실천하는 의로운 복싱인이다.

15년 전 어느날 TV에서 방영된 가슴 아픈 사연을 김병무는 우연히 시청하게 된다. 복싱을 하는 두 소년이 할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으로 가슴이 울컥해진 김 심판은 곧바로 그 소년들 연락처를 알아내어 수년에 걸쳐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 같은 내용은 필자가 동양 웰터급 챔피언을 지낸 박봉관 관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필자에 의해 세상에 밝혀졌다. 그 소년들이 바로 예산 출신의 박봉관 관장 체육관 문하에서 운동하는 수강생(受講生)이었기 때문이다.

김병무 심판은 수년 전에도 강기동 관장의 아들이 한국체대에 진학하자 양복 한 벌을 축하 선물로 전달했다. 인생이란 멀리 보면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나그네 길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얼마나 가치(價値) 있게 살았느냐가 진정한 삶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신두홍 김병무 두 복서들의 의로운 삶을 지켜보면서 문득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永生)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