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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 복서 '비운의 황태자' 서정수

25.09.0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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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3일 대전에서 용인대 92학번 이근혁 관장의 복싱 체육관 개관식이 열렸다. 이날 인천 금강체육관 출신 김영관, 대전체고 출신 신우영 등 두 전직 복서가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이들의 사진을 접하는 순간 비운의 천재 복서 고(故) 서정수가 불현듯 생각났다.

서정수는 김영관이 속한 인천 금강체육관(관장 김광호) 출신이다. 또한 86학번 동료 복서로 체급도 같아 평소에 팽팽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복서였다.

이에 반해 신우영은 대전체고(감독 유관희) 시절 서정수와 1984년 학생선수권과 전국체전에서 맞붙어 1승1패를 기록한 호적수이었다.

서정수는 1966년 11월15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태생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의 타계로 가세가 기울자 인천으로 이사를 간 정수는 금강 체육관(관장 김광호)에서 복싱을 시작한다.

운동을 마치면 동네 빈공터에서 일찍 부친을 여윈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해머를 들고 타이어를 매일 같이 두들겼다.

그렇게 6년 세월이 흘러 1983년 서정수는 인천 운봉공고에 입학한다. 그해 김명복 박사배(코크급)에서 뒷날 세계 챔피언에 오르는 김용강(보인상고)에, 학생선수권 대회에서는 전국 선수권자 신우영(대전체고)에, 대통령배 대회에선 최희용(부산체고)에, 월드컵 선발전에선 황동룡(군산체육관)에, 전국체전에서는 윤병호(전남체고)에 내리 패하면서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다.

1984년에 들어 서정수는 숨어있던 잠재력이 대폭팔해, 템머복싱(핀란드) 선발전에서 김용상(전남체고)을 꺾고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김용상은 LA 올림픽 선발전(플라이급) 최종결승에서 김광선에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 분패한 복서였다. 본선 결승에서 서정수는 러시아의 카림잔을 꺽고 LF급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탄력을 받은 서정수는 재팬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관왕에 오른다. 1985년 1월 서정수는 꿈나무 합숙 때 입소(入所)한 동갑내기 친구 이열우(옥천고)와 스파링을 펼쳐, 그를 샌드백 두들기듯 일방적으로 난타한다.

이를 전환점으로 이열우는 서원대 진학을 포기하고 그해 7월13일 프로로 전향해 세계타이틀 2체급을 석권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편 원숙기에 접어든 서정수는 1985년 월드컵 금메달 오광수(전남체고)를 꺾고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해 인도네시아 대통령배를 석권한 서정수는 제3회 세계 청소년(루마니아) 대회 금메달 황경섭(서원대)과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른 조인주(동국대)를 연거푸 3회 RSC승으로 물리친다.

1986년 홍익대에 진학한 서정수는 제 67회 전국체전 결승에서 윤승희(경희대)와 폭음을 한 상태에서 맞대결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서정수는 1987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와 제1회 서울컵 대회(밴텀급)에서 연거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국제대회 5관왕을 달성한다.




특히 서울컵 대회에서 김승미 감독의 체계적인 조련을 받으면서 서정수는 4강에서 변정일(동국대)을 5ㅡ0 군말 없는 판정으로 잡고 결승에 선착한다.

결승전에서 그는 허영모(해태)를 꺾고 올라온 아르테미에프(러시아) 마저 판정으로 꺾고 우승해, 문성길이 빠진 국내 밴텀급의 최강자임을 공인받는다.

1988년 대망의 서울 올림픽 선발전이 열린다. 밴텀급 1차 선발전에서 허영모, 2차 선발전은 김성길, 3차전·4차전 우승은 변정일과 서정수가 차지하면서 4명의 선수가 최종선발전에 진출한다.

이중 국제대회 금메달이 전무(全無)한 변정일의 전력이 제일 빈약했다. 이때 최종선발전을 앞두고 상무팀 김성길이 축구 경기를 하다 돌연 턱에 부상을 입어 중도에 탈락한다.

변정일에게 선발전에서 2연승을 기록한 사우스포 킬러 김성길은, 올림픽을 앞둔 1987년 제13회 태국 킹스컵 대회에 변정일과 동반 출격해 4강에서 변정일을 꺾고 올라온 태국 선수와 맞대결한다. 김성길은 일방적인 난타로 태국 선수에 5ㅡ0 판정승을 거둔 숨은 고수였다.

결국 허영모·변정일·서정수가 리그전을 벌여 최종우승자를 가리게 된다. 결과는 서정수는 허영모를 꺾고, 허영모는 변정일을, 변정일은 서정수를 꺾으면서 3명의 선수가 나란히 물고 물려 모두 1승1패를 기록한다.

이때 협회는 "허영모가 최근 국제무대에 너무 알려져 장단점이 노출되어 있어, 메달 전망이 어둡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제외시킨다.




결국 서정수와 변정일은 88년 서울 올림픽(밴텀급) 최종 결승전을 펼친다. 같은 사우스포인 서정수는 변정일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2ㅡ3 판정으로 변정일의 손이 올라간다.

이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홍익대학 총장은 불공정한 판정에 크게 분노 곧바로 홍익대학 복싱부를 즉석에서 해체한다.

이 경기는 변정일의 소속팀 한화그룹 복싱 관계자들이 "명색이 서울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에 대한 복싱협회 회장단(한화그룹 회장 김승연) 소속의 선수가 출전해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을 강조하자 이를 복싱협회 이사(理事)진이 암묵적으로 수용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변정일은 신라시대 골품제도에 비유하자면 부모가 왕족인 신의 아들 성골(聖骨)이었다.




이에 반해 서정수는 어둠의 자식인 견골(犬骨) 이었다. 1989년 9월 서정수는 동아체육관 김현치 회장과 계약서(계약금 3000만원)에 서명을 하고 프로 진출을 선언한다. 5전 안에 세계 타이틀전을 성사시킨다는 구두 약속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필리핀의 비세라를 8회 판정으로 꺾고 서전을 장식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경기가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만다.

이유는 계약금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사연을 품고 결국 복싱계를 떠난 정수는 1990년 일반병으로 군에 입대한다.

1992년 전역을 한 정수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용접 기술을 배운다. 그리고 홀어머니와 떨어져 인천 모처에서 월세방을 얻어 술을 벗 삼아 연명하던 그는, 2015년 5월21일 향년 49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쓸쓸하게 떠나갔다.

그의 마지막 떠나는 길에 변정일이 함께해 떠나가는 친구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올렸다. 이름 모를 해변가 모래밭에 푹 처박힌 콜라병처럼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린 그 이름 서정수, "편히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