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 복싱인들과 논산 출신 이인제 전 의원의 만남
2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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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난 7월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용역회사 '월드 와이드'의 김태호 회장이었다.
내용인즉 강남 모처에서 조철제 회장, 김승미 전 대표팀 감독, 박형춘 전 한국체대 복싱 감독과 오찬을 함께하자는 내용이었다.
모임을 주선한 1952년 서울 태생의 김태호(대경상고)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밴텀급)에서 올림픽 대표 출신의 서상영(군산체육관)에 5ㅡ0 판정승을 거두고 대표팀에 승선했다. 김기수에 이어 2번째로 고교생이 국가대표로 선발된 복서다.
그러나 본선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주목받던 김태호는 결승 문턱에서 아깝게 패해 동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이때 단장으로 참관한 장덕진이 부당한 판정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발끈했을 정도로 내용상 김태호가 이긴 경기였다.
당시 18세 김태호는 최연소 복싱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은메달을 목에 건 박형춘은 30세 최고령으로 출전한 대회였다.
1934년 강원도 춘천태생의 고시 3관왕 장덕진은 육영수 여사 친언니 육인순의 첫째 사위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로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이날 오찬 모임에서 김태호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자신을 지도한 송영수 대표팀 사범을 부모 같은 스승이라고 밝혔다. 1927년 서울 마포태생의 송영수는 조성구 관장의 지도로 복싱을 수학하다 6·25 사변때 원주에 정착했다. 지용주, 박형춘을 발굴하며 대표팀에 코치로 합류한 인물이다.
송 사범은 1969년 8월 제4회 아시아선수권 선발전 지용주(수협)와 고생근(전매청)의 대결에서 지용주가 열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3ㅡ2 판정으로 경기를 뒤집으며 승리를 연출할 정도로 권투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1971년 김태호(경희대)는 1972년 뮌헨올림픽에 출전해 4강 문턱에서 탈락했다. 그해 김태호는 제26회 세계 군인선수권, 제6회 아시아선수권,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 한미 국가대항전(MVP), 1975년 제27회 세계 군인선수권을 차례로 접수하며 기록적인 5관왕을 달성한다.
120전을 속사포 펀치로 무장한 김태호를 이긴 복서는 서상영, 고생근, 김성은 단 3명에 불과 할 정도로 그는 금강불괴 같은 라이트급 1인자였다.
그런 전력을 보유한 김태호는 자신이 대표팀 시절에 한국 아마복싱의 선봉에 섰던 조철제 당시 전무를 비롯해 김승미, 박형춘 선배들과 모처럼 지난 추억을 공유하려고 자리를 마련했다. 이에 필자는 홍성민 SM 대표와 함께 목적지로 향했다.
김태호의 성동체육관 선배인 김승미는 1945년 전남 고흥태생으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대표(미들급) 출신이다. 그는 명지대 재학시절 LF 급 김충배, B급의 남영웅, L급 신춘교, LH급 김상만과 함께 명지대학이 대학 무대를 석권하는데 주력 선수로 활약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한 김승미는 현역에서 은퇴 후 1982년 3월 김승연 회장의 추천으로 복싱 볼모지 네팔 국가대표 감독으로 파견됐다. 네팔 대표팀은 1984년 5월 킹스컵 대회에서 네팔 복싱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그해 9월 이어진 서남 아시아컵 (SAF) 대회에서도 네팔은 2체급을 석권해, 김승미는 네팔복싱의 대부란 명성을 얻었다.
귀국한 김 감독은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을 거쳐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김광선, 박시헌, 백현만 등 주력들이 대거 퇴진한 1989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해 7월에 개최된 제14회 북경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12체급에 선수를 출전시켜 8체급 금메달(조동범, 한광형, 황경섭, 이훈, 유장현, 정동환, 박세종, 채성배)을 석권하며 대회 6연패를 달성하는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창출했다.
김 감독은 헐거운 대표팀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컵 2연패를 달성 하는 등 4차례 국제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하면서 연거푸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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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무명의 홍성식을 조련해 라이트급 준결승에서 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미국)와 초박빙의 사투를 벌여 비록 11ㅡ10 한점차 판정에 고개를 숙였지만, 빼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아 이후 '자랑스런 서울 정도 600인'에 선정되었다.
1940년 전남 보성 출신의 박형춘은 전남공고 1학년 때인 1957년 전남복싱 대부 이재인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기본기를 익혔고 구원주라는 선배의 도움으로 세밀한 복싱 스킬을 완성했다.
1963년 강원도 원주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강원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3회(44회 47회 49회)에 걸쳐 금메달을 따내며 복싱 볼모지 원주복싱에 도화선(導火線)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65년 군 재대 후 원주에 정착해 원주대학과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한 박형춘은 1970년 제4회 아시아선수권(미들급) 우승과 그 해 12월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따며 국위를 선양했다.
현역에서 은퇴 후 1977년 한국체대 창단 감독으로 입성했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그의 조련을 받은 L급 김인창과 W급 황충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체대 복싱 발전에 기폭제(起爆劑) 역할을 했다.
1979년 조철제 복싱협회 전무의 추천으로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의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그는, 그해 10월 조철제 회장에 의해 제1회 뉴욕 월드컵 대회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됐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까지 15년 동안 대표선수들을 지도하며 한국 아마복싱이 아시아 무대를 석권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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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을 마치고 나오면서 현장에서 귀한 분과 조우(遭遇)했다. 주인공은 6선 국회의원과 제10대 노동부 장관, 제29대 경기도 지사를 지낸 이인제 전 의원이었다.
필자의 요청에 이인제 의원은 흔쾌히 사진 촬영에 응해 복싱인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1948년 논산태생의 이인제 의원과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 지난 5월 30일 지병인 위암으로 타계한 논산 출신의 장윤창 교수가 생각났다.
이인제, 장윤창 두 분은 논산이란 고장에서 정계와 스포츠계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장윤창 교수는 13년 전 필자가 주최한 장정구 챔프 타이틀 획득 30주년 기념식장(역삼동)에서 첫인사를 나누면서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맺었다.
장윤창은 1977년 인창고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돼 무려 15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한국배구 역사에서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시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인제, 장윤창 두 분의 탄생지 논산은 과거 복싱의 도시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1944년 논산태생의 정백철 관장이 논산 복싱에 혁명(?)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이분은 선수 양성에 헌신적으로 투신한 복싱인이었다.
정 관장은 온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유망 선수발굴에 주력했다. 그분의 손을 거쳐 1978년 세계 군인선수권(나이지리아) 동메달을 따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최종선발전(M급)에 출전한 김종대(수경사), 청소년 대표 출신에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한 전일선(한국체대), 198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LH 급 국가대표 이영기(한국체대), 1978년 제8회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 라이트 웰터급 우승자 김기선(한국체대), 1981년 학생선수권 우승자 송순호(원광대), 1988년 서울 올림픽 2차 선발전에 출전한 이병장(용인대), 1991년 제44회 전국 신인대회 우승자 최승남(논산공고) 등 보석 같은 복서들이 연거푸 쏟아졌다.
그러나 황산벌(논산군 연산면) 전투에서 계백장군이 5천 결사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면서 백제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듯이 정백철 관장이 복싱계를 떠나자 논산 복싱 역사도 떨어지는 꽃잎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청양군청팀 복싱 감독 정수현이 바로 그 유명한 정백철 관장의 아들이다.
필자가 지켜본 논산 복서들의 특징은 계백 사단의 5천 결사 영향을 받았는지 몰라도 물러섬 없이 불퇴전(不退轉)의 타격전을 펼치는 파이터 스타일의 복서들이 유독 많았다.
프로복싱으로 눈을 돌리면 WBC 플라이급 세계 1위이자 유명우와 팽팽한 백중세의 경기를 펼친 안래기, 웰터급에서 49전을 싸운 고(故) 황준석을 유일하게 KO 시킨 이승순도 바로 이 고장 논산 출신의 복서들이다.
이번주 칼럼에서는 복싱 원로분들과 충남 논산 출신의 원로 정치인 이인제 의원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이들에 얽힌 복싱 역사를 돌아보았다. 이날 귀한 자리를 제공한 김태호 월드와이드 회장을 비롯해 조철제 회장, 김승미 대표팀 감독, 박형춘 한국체대 감독에게 거듭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내용인즉 강남 모처에서 조철제 회장, 김승미 전 대표팀 감독, 박형춘 전 한국체대 복싱 감독과 오찬을 함께하자는 내용이었다.
모임을 주선한 1952년 서울 태생의 김태호(대경상고)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밴텀급)에서 올림픽 대표 출신의 서상영(군산체육관)에 5ㅡ0 판정승을 거두고 대표팀에 승선했다. 김기수에 이어 2번째로 고교생이 국가대표로 선발된 복서다.
그러나 본선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주목받던 김태호는 결승 문턱에서 아깝게 패해 동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이때 단장으로 참관한 장덕진이 부당한 판정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발끈했을 정도로 내용상 김태호가 이긴 경기였다.
당시 18세 김태호는 최연소 복싱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은메달을 목에 건 박형춘은 30세 최고령으로 출전한 대회였다.
1934년 강원도 춘천태생의 고시 3관왕 장덕진은 육영수 여사 친언니 육인순의 첫째 사위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로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이날 오찬 모임에서 김태호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자신을 지도한 송영수 대표팀 사범을 부모 같은 스승이라고 밝혔다. 1927년 서울 마포태생의 송영수는 조성구 관장의 지도로 복싱을 수학하다 6·25 사변때 원주에 정착했다. 지용주, 박형춘을 발굴하며 대표팀에 코치로 합류한 인물이다.
송 사범은 1969년 8월 제4회 아시아선수권 선발전 지용주(수협)와 고생근(전매청)의 대결에서 지용주가 열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3ㅡ2 판정으로 경기를 뒤집으며 승리를 연출할 정도로 권투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1971년 김태호(경희대)는 1972년 뮌헨올림픽에 출전해 4강 문턱에서 탈락했다. 그해 김태호는 제26회 세계 군인선수권, 제6회 아시아선수권,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 한미 국가대항전(MVP), 1975년 제27회 세계 군인선수권을 차례로 접수하며 기록적인 5관왕을 달성한다.
120전을 속사포 펀치로 무장한 김태호를 이긴 복서는 서상영, 고생근, 김성은 단 3명에 불과 할 정도로 그는 금강불괴 같은 라이트급 1인자였다.
그런 전력을 보유한 김태호는 자신이 대표팀 시절에 한국 아마복싱의 선봉에 섰던 조철제 당시 전무를 비롯해 김승미, 박형춘 선배들과 모처럼 지난 추억을 공유하려고 자리를 마련했다. 이에 필자는 홍성민 SM 대표와 함께 목적지로 향했다.
김태호의 성동체육관 선배인 김승미는 1945년 전남 고흥태생으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대표(미들급) 출신이다. 그는 명지대 재학시절 LF 급 김충배, B급의 남영웅, L급 신춘교, LH급 김상만과 함께 명지대학이 대학 무대를 석권하는데 주력 선수로 활약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한 김승미는 현역에서 은퇴 후 1982년 3월 김승연 회장의 추천으로 복싱 볼모지 네팔 국가대표 감독으로 파견됐다. 네팔 대표팀은 1984년 5월 킹스컵 대회에서 네팔 복싱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그해 9월 이어진 서남 아시아컵 (SAF) 대회에서도 네팔은 2체급을 석권해, 김승미는 네팔복싱의 대부란 명성을 얻었다.
귀국한 김 감독은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을 거쳐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김광선, 박시헌, 백현만 등 주력들이 대거 퇴진한 1989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해 7월에 개최된 제14회 북경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12체급에 선수를 출전시켜 8체급 금메달(조동범, 한광형, 황경섭, 이훈, 유장현, 정동환, 박세종, 채성배)을 석권하며 대회 6연패를 달성하는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창출했다.
김 감독은 헐거운 대표팀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컵 2연패를 달성 하는 등 4차례 국제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하면서 연거푸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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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무명의 홍성식을 조련해 라이트급 준결승에서 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미국)와 초박빙의 사투를 벌여 비록 11ㅡ10 한점차 판정에 고개를 숙였지만, 빼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아 이후 '자랑스런 서울 정도 600인'에 선정되었다.
1940년 전남 보성 출신의 박형춘은 전남공고 1학년 때인 1957년 전남복싱 대부 이재인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기본기를 익혔고 구원주라는 선배의 도움으로 세밀한 복싱 스킬을 완성했다.
1963년 강원도 원주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강원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3회(44회 47회 49회)에 걸쳐 금메달을 따내며 복싱 볼모지 원주복싱에 도화선(導火線)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65년 군 재대 후 원주에 정착해 원주대학과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한 박형춘은 1970년 제4회 아시아선수권(미들급) 우승과 그 해 12월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따며 국위를 선양했다.
현역에서 은퇴 후 1977년 한국체대 창단 감독으로 입성했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그의 조련을 받은 L급 김인창과 W급 황충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체대 복싱 발전에 기폭제(起爆劑) 역할을 했다.
1979년 조철제 복싱협회 전무의 추천으로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의 경호실장으로 발탁된 그는, 그해 10월 조철제 회장에 의해 제1회 뉴욕 월드컵 대회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됐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까지 15년 동안 대표선수들을 지도하며 한국 아마복싱이 아시아 무대를 석권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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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을 마치고 나오면서 현장에서 귀한 분과 조우(遭遇)했다. 주인공은 6선 국회의원과 제10대 노동부 장관, 제29대 경기도 지사를 지낸 이인제 전 의원이었다.
필자의 요청에 이인제 의원은 흔쾌히 사진 촬영에 응해 복싱인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1948년 논산태생의 이인제 의원과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 지난 5월 30일 지병인 위암으로 타계한 논산 출신의 장윤창 교수가 생각났다.
이인제, 장윤창 두 분은 논산이란 고장에서 정계와 스포츠계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장윤창 교수는 13년 전 필자가 주최한 장정구 챔프 타이틀 획득 30주년 기념식장(역삼동)에서 첫인사를 나누면서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맺었다.
장윤창은 1977년 인창고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돼 무려 15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한국배구 역사에서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시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인제, 장윤창 두 분의 탄생지 논산은 과거 복싱의 도시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1944년 논산태생의 정백철 관장이 논산 복싱에 혁명(?)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이분은 선수 양성에 헌신적으로 투신한 복싱인이었다.
정 관장은 온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유망 선수발굴에 주력했다. 그분의 손을 거쳐 1978년 세계 군인선수권(나이지리아) 동메달을 따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최종선발전(M급)에 출전한 김종대(수경사), 청소년 대표 출신에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한 전일선(한국체대), 198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LH 급 국가대표 이영기(한국체대), 1978년 제8회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 라이트 웰터급 우승자 김기선(한국체대), 1981년 학생선수권 우승자 송순호(원광대), 1988년 서울 올림픽 2차 선발전에 출전한 이병장(용인대), 1991년 제44회 전국 신인대회 우승자 최승남(논산공고) 등 보석 같은 복서들이 연거푸 쏟아졌다.
그러나 황산벌(논산군 연산면) 전투에서 계백장군이 5천 결사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면서 백제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듯이 정백철 관장이 복싱계를 떠나자 논산 복싱 역사도 떨어지는 꽃잎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청양군청팀 복싱 감독 정수현이 바로 그 유명한 정백철 관장의 아들이다.
필자가 지켜본 논산 복서들의 특징은 계백 사단의 5천 결사 영향을 받았는지 몰라도 물러섬 없이 불퇴전(不退轉)의 타격전을 펼치는 파이터 스타일의 복서들이 유독 많았다.
프로복싱으로 눈을 돌리면 WBC 플라이급 세계 1위이자 유명우와 팽팽한 백중세의 경기를 펼친 안래기, 웰터급에서 49전을 싸운 고(故) 황준석을 유일하게 KO 시킨 이승순도 바로 이 고장 논산 출신의 복서들이다.
이번주 칼럼에서는 복싱 원로분들과 충남 논산 출신의 원로 정치인 이인제 의원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이들에 얽힌 복싱 역사를 돌아보았다. 이날 귀한 자리를 제공한 김태호 월드와이드 회장을 비롯해 조철제 회장, 김승미 대표팀 감독, 박형춘 한국체대 감독에게 거듭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