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복싱 부활 위해 최한기 감독 중심으로 뭉친 복싱인들
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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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난 5월 스승의날을 맞이해 천안시 모처에서 최한기 충의대 복싱체육관
감독을 중심으로 현재 이 고장에서 활동하는 복싱인들이 대거 집결해 단합
대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는 SK 에코 플랜트 지진형 부장이 지난날 자신의 스승 최한기 감
독을 위해 마련한 보은 이벤트였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하면서 뭉친 사람들은
행복연합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2년 충남 보령태생의 지진형은 대천고 재학시절 출중한 복싱 스펙으
로 정상급 실력을 보유해 한국체대행이 예약된 유망주였다. 현재는 SK 에
코 플랜트 부장으로 산업현장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1957년 천안태생의 최한기 감독은 1987년 천안에 위치한 충의대(교도소
복싱부) 소속 감독으로 부임했다. 사회에서 KO 당한 청소년 재소자들을 한
세대에 걸쳐 지도해, 그들이 새 출발할 때 디딤돌 역할을 한 의롭고 참된 지도자다.
복서 이전에 창살에 갇힌 죄인인 그들에게 링은 세상에 나갈수 있는 유일
한 통로였다. 최한기 감독은 절망 속에 갇힌 이들에게 복싱을 통해 인생 2
막의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현재 모든 걸 접고 천안에서 충의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최한기 감독은 부상으로 인해 화려한 선수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비운의 복서 출신이다.
1979년 동원체육관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한 그는 7승 4패를 기록 한국(KBC) 라이트급 3위에 랭크 된다. 그리고 1980년 6월 최한기 감독은 7전 5승 1무 1패를 기록한 동아체육관 동급 1위 김득구와 운명적인 라이벌전을 벌인다.
이 경기에서 왼손잡이 복서 김득구와 팽팽한 일진일퇴의 접전을 펼치던 최한기 감독은 불의의 손목 부상으로 3회에 경기를 포기했고 그 뒤 미련 없이 복싱을 접었다.
그때 그 경기를 이겼다면 그의 복싱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반면 김득구는 최한기 전을 시발점으로 2년 5개월 동안 기록적인 12연승(7KO)을 거두면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한 경기를 통해 양 선수의 복싱 항로가 극명하게 엇갈린 것이다. WBA 라이트급 1위에 오른 김득구의 13연승 길목에서 만난 상대가 WBA 라이트급 챔피언 맨시니였다.
결국 1982년 11월 14회 KO패 당하면서 링 위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최한기 감독은 김득구의 죽음을 통해 삶의 유한함과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란 현실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한편 최한기 감독은 1987년부터 지도자로 변신해 충의 소년원 복싱 감독으로 30년간 재능기부(才能寄附)를 하면서 한길을 걸었다. 모 대학과 시청 군청에서 감독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아니면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순수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충의대 감독으로 전국 신인 선수권 9연패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았다.
현재 68살의 최한기 감독은 모든걸 내려놓고 천안시에서 충의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진형과 최한기 감독의 인연은 지진형이 1984년 대천중 1학년에 입학해 최한기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시작되고 그 후로도 고교를 졸업한 6년 동안 지속된다. 지진형은 지난날 자신을 지도한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스승의날을 맞이해 이날 뜻깊고 의미 있는 행사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천안복싱을 대표하는 복서 정순현 대광 그룹 회장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1952년 천안태생으로 충청도의 상징적인 프로 복서 정순현 회장은 국내 최초로 3차례에 걸쳐 세계 타이틀전을 펼친 복서다.
정순현 회장은 현역에서 은퇴 후 천호동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면서 사업가로 변신, 서울의 심장부 잠실에 APT를 장만하는 등 사업에 크게 성공하며 복싱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날 정순현 회장은 인사말에서 최한기 관장을 중심축으로 젊은 지도자들이 단결해 천안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포함한 세계 챔피언 탄생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까이서 지켜본 정순현 회장은 지난 세월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청춘의 봄날 같은 의욕을 지니고 활기 넘치는 인생을 살아가는 스타일이다.
이날 참석한 국화원 장례식장 대표 윤호현은 용인대 83학번으로 태권도 국가대표상비군 출신이다.
천안시에서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윤호현 대표의 아내인 김미화 여사는 전도유망(前途有望)한 천안시 시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들 부부도 천안복싱 저변(底邊)에서 향후 핵심 역활을 할 인물들이다. 이날 이 자리에는 천안과 아산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연집, 최양선 두 관장도 참석 선배들의 조언을 경청하였다.
김연집과 최양선은 공교롭게도 복싱계 명장 김왕순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충남체고 출신의 엘리트 복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최양선은 1978년 충남 보령시 상주면 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대천복싱 체육관에서 복싱을 시작하면서 대명중 3학년 때 첫 전국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어서 1994년 충남체고에 입학, 김왕순 사단의 일원으로 그의 지도 편달을 받으며 1995년 전국체전 라이트 미들급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졸업반인 1996년 제7회 전국 회장 배 대회 중고선수권대회에서는 라이트 헤비급으로 출전해 대망의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그 후 1997년 용인대학에 입학한 최양선은 그해 11월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2체급에서 유일하게 용인대 소속으로 대표팀에 뽑혀 선수촌에 입촌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1998년 제79회 전국체전에서 충남 대표로 출전한 최양선은 역시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다.
이 금메달 역시 충남팀 대학부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1999년 10월 최양선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지역 예선전을 겸한 제20회 아시아선수권 대회 8강에서 올림픽 본선 우승자인 카자흐스탄 선수에게 패배, 아쉽게 탈락하면서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2008년 강원도 동해 망상해수욕장 특설 링에서 개최된 대한 생활체육 복싱대회에서 18명을 출전시켜 금메달 9개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대회에서 최양선 관장은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하였다.
천안 up체육관 김연집 관장.
1974년 천안태생의 김연집 관장 역시 충남체고 재학시절 복싱계 명장 김왕순 감독의 지도로 1993년 9월 제14회 전국 화장배, 10월에 열린 제74회 전국체전 고등부 라이트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2관왕을 달성해 걸출한 실력을 인정받은 복서다.
원광대학에 진학한 뒤 1994년 4월 제5회 대학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임정빈(호남대)에게, 1996년 11월 제50회 전국선수권대회 라이트 미들급 결승에서 윤용찬(상무)에게 각각 판정패를 당하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하지만 이를 전환점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돼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전방위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대전 극동체육관에 소속해 프로로 전향한 뒤 2002년 한국 웰터급 정상에 오르면서 녹록지 않은 실력을 과시한 복서 출신이다.
은퇴 후 천안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한국 미들급 챔피언 이재명, 슈퍼 웰터급 챔피언 정재섭 등 다수의 챔피언을 배출해 내는 등 지도력이 검증된 지도자다. 계절의 여왕 5월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참석하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천안복싱 체육관의 무궁한 발전을 응원한다.
감독을 중심으로 현재 이 고장에서 활동하는 복싱인들이 대거 집결해 단합
대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는 SK 에코 플랜트 지진형 부장이 지난날 자신의 스승 최한기 감
독을 위해 마련한 보은 이벤트였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하면서 뭉친 사람들은
행복연합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2년 충남 보령태생의 지진형은 대천고 재학시절 출중한 복싱 스펙으
로 정상급 실력을 보유해 한국체대행이 예약된 유망주였다. 현재는 SK 에
코 플랜트 부장으로 산업현장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1957년 천안태생의 최한기 감독은 1987년 천안에 위치한 충의대(교도소
복싱부) 소속 감독으로 부임했다. 사회에서 KO 당한 청소년 재소자들을 한
세대에 걸쳐 지도해, 그들이 새 출발할 때 디딤돌 역할을 한 의롭고 참된 지도자다.
복서 이전에 창살에 갇힌 죄인인 그들에게 링은 세상에 나갈수 있는 유일
한 통로였다. 최한기 감독은 절망 속에 갇힌 이들에게 복싱을 통해 인생 2
막의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현재 모든 걸 접고 천안에서 충의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최한기 감독은 부상으로 인해 화려한 선수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비운의 복서 출신이다.
1979년 동원체육관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한 그는 7승 4패를 기록 한국(KBC) 라이트급 3위에 랭크 된다. 그리고 1980년 6월 최한기 감독은 7전 5승 1무 1패를 기록한 동아체육관 동급 1위 김득구와 운명적인 라이벌전을 벌인다.
이 경기에서 왼손잡이 복서 김득구와 팽팽한 일진일퇴의 접전을 펼치던 최한기 감독은 불의의 손목 부상으로 3회에 경기를 포기했고 그 뒤 미련 없이 복싱을 접었다.
그때 그 경기를 이겼다면 그의 복싱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반면 김득구는 최한기 전을 시발점으로 2년 5개월 동안 기록적인 12연승(7KO)을 거두면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한 경기를 통해 양 선수의 복싱 항로가 극명하게 엇갈린 것이다. WBA 라이트급 1위에 오른 김득구의 13연승 길목에서 만난 상대가 WBA 라이트급 챔피언 맨시니였다.
결국 1982년 11월 14회 KO패 당하면서 링 위에서 장렬하게 산화했다. 최한기 감독은 김득구의 죽음을 통해 삶의 유한함과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란 현실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한편 최한기 감독은 1987년부터 지도자로 변신해 충의 소년원 복싱 감독으로 30년간 재능기부(才能寄附)를 하면서 한길을 걸었다. 모 대학과 시청 군청에서 감독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아니면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순수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충의대 감독으로 전국 신인 선수권 9연패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았다.
현재 68살의 최한기 감독은 모든걸 내려놓고 천안시에서 충의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진형과 최한기 감독의 인연은 지진형이 1984년 대천중 1학년에 입학해 최한기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시작되고 그 후로도 고교를 졸업한 6년 동안 지속된다. 지진형은 지난날 자신을 지도한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스승의날을 맞이해 이날 뜻깊고 의미 있는 행사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천안복싱을 대표하는 복서 정순현 대광 그룹 회장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1952년 천안태생으로 충청도의 상징적인 프로 복서 정순현 회장은 국내 최초로 3차례에 걸쳐 세계 타이틀전을 펼친 복서다.
정순현 회장은 현역에서 은퇴 후 천호동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면서 사업가로 변신, 서울의 심장부 잠실에 APT를 장만하는 등 사업에 크게 성공하며 복싱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날 정순현 회장은 인사말에서 최한기 관장을 중심축으로 젊은 지도자들이 단결해 천안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포함한 세계 챔피언 탄생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까이서 지켜본 정순현 회장은 지난 세월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청춘의 봄날 같은 의욕을 지니고 활기 넘치는 인생을 살아가는 스타일이다.
이날 참석한 국화원 장례식장 대표 윤호현은 용인대 83학번으로 태권도 국가대표상비군 출신이다.
천안시에서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윤호현 대표의 아내인 김미화 여사는 전도유망(前途有望)한 천안시 시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들 부부도 천안복싱 저변(底邊)에서 향후 핵심 역활을 할 인물들이다. 이날 이 자리에는 천안과 아산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연집, 최양선 두 관장도 참석 선배들의 조언을 경청하였다.
김연집과 최양선은 공교롭게도 복싱계 명장 김왕순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충남체고 출신의 엘리트 복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최양선은 1978년 충남 보령시 상주면 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대천복싱 체육관에서 복싱을 시작하면서 대명중 3학년 때 첫 전국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어서 1994년 충남체고에 입학, 김왕순 사단의 일원으로 그의 지도 편달을 받으며 1995년 전국체전 라이트 미들급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졸업반인 1996년 제7회 전국 회장 배 대회 중고선수권대회에서는 라이트 헤비급으로 출전해 대망의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그 후 1997년 용인대학에 입학한 최양선은 그해 11월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2체급에서 유일하게 용인대 소속으로 대표팀에 뽑혀 선수촌에 입촌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1998년 제79회 전국체전에서 충남 대표로 출전한 최양선은 역시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다.
이 금메달 역시 충남팀 대학부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1999년 10월 최양선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지역 예선전을 겸한 제20회 아시아선수권 대회 8강에서 올림픽 본선 우승자인 카자흐스탄 선수에게 패배, 아쉽게 탈락하면서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2008년 강원도 동해 망상해수욕장 특설 링에서 개최된 대한 생활체육 복싱대회에서 18명을 출전시켜 금메달 9개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대회에서 최양선 관장은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하였다.
천안 up체육관 김연집 관장.
1974년 천안태생의 김연집 관장 역시 충남체고 재학시절 복싱계 명장 김왕순 감독의 지도로 1993년 9월 제14회 전국 화장배, 10월에 열린 제74회 전국체전 고등부 라이트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2관왕을 달성해 걸출한 실력을 인정받은 복서다.
원광대학에 진학한 뒤 1994년 4월 제5회 대학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임정빈(호남대)에게, 1996년 11월 제50회 전국선수권대회 라이트 미들급 결승에서 윤용찬(상무)에게 각각 판정패를 당하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하지만 이를 전환점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돼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전방위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대전 극동체육관에 소속해 프로로 전향한 뒤 2002년 한국 웰터급 정상에 오르면서 녹록지 않은 실력을 과시한 복서 출신이다.
은퇴 후 천안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한국 미들급 챔피언 이재명, 슈퍼 웰터급 챔피언 정재섭 등 다수의 챔피언을 배출해 내는 등 지도력이 검증된 지도자다. 계절의 여왕 5월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참석하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천안복싱 체육관의 무궁한 발전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