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스포츠 칼럼] 대한 복싱협회 종별선수권대회 경기장에서 만난 심판위원들조영섭기자
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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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사의창=조영섭 기자] 지난 주말 충남 청양 실내체육관 에서 2025 전국 중고 종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목적지로 출발하였다. 마침 현장에서 고등부 65Kg급 SM 체육관 이세창 선수의 경기가 벌어져 그가 판정승을 거두는 경기를 관전하고 곧바로 심판위원석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이창근 심판위원의 안내로 조용준 심판위원장을 비롯 이현주 김재만 이상우 박동욱 기술 위원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1963년 전남 순천 출신의 조용준 심판위원장은 허영모 최종달 성광배 등과 함께 순천금당고 전성 시절 한축 을 담담한 복서 출신이다. 전남 순천은 국내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 랭커 서정권 선생 탄생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또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남승룡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남선생의 조카인 남영웅도 1969년 명지대 재학중 학생 대표로 한일 국가대항전(페더급)에 출전한 복싱인이란 점이다.
한편 필자를 안내한 진중한 성품의 이창근 심판위원은 1961년 전북 고창 출신으로 전북체고 재학시절 촉망받는 배구선수 출신이었다. 그러나 2학년 때 돌연 복싱으로 방향 전환 졸업반인 1979년 제1회 세계 청소년 선수권 선발전에 라이트 미들급으로 출전 파죽의 3연승(2KO)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 윤영복(오성체) 에 근소한 차로 판정패를 당했다.
이어진 전국선수권대회에서도 김명복 배 5연패를 달성한 관록이 묻어난 사우스포 김현호(한국체대)에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로 맞대결 초접전 끝에 3ㅡ2 판정패를 당한다. 이때 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박형춘 한국체대 감독에 의해 1980년 한국체대 4기생으로 진학한다. 그해 5월 제4회 김명복 박사배 웰터급에 출전한 이창근은 준결승에서 예리한 카운터로 동아대 김남수를 꺾고 돌풍을 일으키면서 우승을 차지한다. 김남수는 국가대표간판 오영세(수경사)를 RSC로 잡은 스펙이 뛰어난 복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 대헌 공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복싱팀 감독을 겸직한 이창근은 1989년 학생선수권 플라이급에 출전한 김세준이 고교 랭킹 1위 당곡고 곽대영을 4강전에서 꺾으며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에 진출한다. 1991년 제2회 연맹 회장배 대회에서는 대헌공고 라이트 플라이급 임덕민이 고광묵 (배재고) 을 2회 RSC로 꺾고 최우수복서(MVP) 발탁된다.
탄력을 받은 임덕민은 1992년 프레올림픽(바로셀로나) 은메달에 이어 1993년 태평양 국제대회(러시아) 우승을 차지했다. 1992년에는 이창근 사단의 밴텀급 박상민. 라이트 미들급 박정원 쌍두마차가 군림하면서 학생선수권 세계 청소년 선발전 대회에 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한다. 이창근 감독은 최우수지도자상을 받으면서 강석구(대천복싱) 심판과 함께 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세계 청소년 대회(캐나다)에 출전하였다. 이창근 심판위원은 3년전 대헌 공고 교사직을 정년퇴임 지금은 무직(?) 상태다.
부산 광무 체육관 한진흥 관장의 지도를 받은 이상우 심판은 영남 상고 재학시절 청소년 대표로 활약하면서 1980년 한중 국가대항전에 학생 대표로 출전한 경력이 있는 심판이다. 1981년 인천체대에 진학한 이상우 심판은 졸업후 지도자로 변신 부산 다선중학교 복싱팀을 맡아 5년간 지도하면서 그 짧은 기간 김정원 김기태 한상호 백승원을 비롯 수많은 명복서 들을 배출하면서 각종 전국 학생대회(중등부)에서 도합 40여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들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인 김정원은 동아대 원주시청을 거치면서 제28회 킹스컵대회(라이트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한상호는 부산체고 재학시절 아시아 청소년대회와 87회 전국체전(페더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체대에 진학 스승 이상우 심판위원의 은혜에 보은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소년체전에서 10년 만에 부산선수단에 금메달을 안겨준 김기태의 메달을 포함 소년체전에서만 5년간 알토란같은 금3. 은 1. 동 6개를 쟁취하면서 명지도자반열에 올라선 인물이 바로 이상우 심판위원이다.
특히 미남 텔런트 안보현도 손대는 일마다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이상우 심판의 미다스 손(Midis touch)을 거쳐 소년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꿈나무 대표출신 김준희와 반정훈도 이상우 심판의 손을 거쳐 탄생한 진품명품 들이다.
큰 따님이 연세대 통계학과를 졸업한 이용장 심판위원은 복싱인들중 인문학 지식(人文學知植)이 가장 뛰어난 인물중 한명이다. 이용장 심판위원은 1960년 전주태생으로 형제 복서로 유명하다. 전주 상고 재학시절 킹스컵 국가대표 이봉래( 한국체대)를 2차례 꺾은 이용장은 권현규 지택림등 정상급 복서들에게 고배를 마시면도 굴치않고 한뼘씩 성장한다.
결국 복싱에 물이 오른 1960년 61회 전국체전 밴텀급 준결승에서 1979년 청소년 대표 출신의 사우스포 강타자 김평국(경상대)을 결승전에선 김명복배 대학부 우승자 임창용(동아대)를 각각 판정으로 꺾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용장의 친형 이용선 관장은 1968년 제 49회 전국체전 동메달 리스트로 동생 이용장이 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숙소까지 4Km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온 유명한 일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당시 전국체전은 일반부 대학부 구분 없이 전 선수가 총출전한 왕중왕전으로 펼쳤기에 금메달의 무게가 남달랐던 대회로 기억된다. 1986년 꿈나무 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수많은 선수들을 조련한 이용선 관장은 1991년 국제심판(FABA)으로 활약하면서 1993년 방글라데시 감독으로 선임되어 국위를 선양한 인물이다.
1963년 4월21일 대구 태생의 정희조는 경북 체중 재학시절 전도유망한 육상 선수 출신이다. 1979년 경북체고에 입학 복싱으로 전환 1980년 대통령배 경북대표로 밴텀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주목을 받는다. 이후 국내 복싱사상 최초로 5체급에서 국가대표를 역임한 신창석을 꺾고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1987년 세계 군인선수권 대회와 한미 국가대항전을 석권 국제대회 2관왕을 달성한다.
그러나 정희조는 1982년 9월 베네주엘라에서 개최된 제1회 시몬 볼리바르컵 대회에서 푸에르 토리코 발도나도 에게 판정패를 당한 경기와 1986년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 라이트급 경기에서 전진철(원광대)에 3ㅡ2 로 패한 지난 경기는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운 경기였다. 은퇴 후 대구중 리 중학 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지도자로 변신한 정희조는 1994년 제23회 소년체전에서 코크급의 이상호 플라이급 하헌석 라이트급 변성만이 금메달 3개를 획득한다.
그리고 1997년 성서공고 감독 시절 제7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밴텀급의 이상호 라이트 웰터급의 문성만 웰터급의 김정환이 역시 3개의 금메달을 획득 기염을 토했다. 중 . 고 를 옮겨 다니면서 학원 스포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인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서 한 팀이 한 대회에서 금메달 3개씩을 획득한 이 같은 기록은 복싱 백년사에 전무후무한 불멸의 대기록이다.
끝으로 필자와 35년이 넘는 유구한 추억의 복싱 역사를 공유한 이창근 이용장 정희조 이상우 네 분의 심판위원을 지켜보면서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정렬과 투지까지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기에 오랫동안 한국복싱 발전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드리면서 이번주 스포츠 컬럼을 마무리한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시사의창=조영섭 기자] 지난 주말 충남 청양 실내체육관 에서 2025 전국 중고 종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목적지로 출발하였다. 마침 현장에서 고등부 65Kg급 SM 체육관 이세창 선수의 경기가 벌어져 그가 판정승을 거두는 경기를 관전하고 곧바로 심판위원석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이창근 심판위원의 안내로 조용준 심판위원장을 비롯 이현주 김재만 이상우 박동욱 기술 위원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1963년 전남 순천 출신의 조용준 심판위원장은 허영모 최종달 성광배 등과 함께 순천금당고 전성 시절 한축 을 담담한 복서 출신이다. 전남 순천은 국내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 랭커 서정권 선생 탄생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또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남승룡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남선생의 조카인 남영웅도 1969년 명지대 재학중 학생 대표로 한일 국가대항전(페더급)에 출전한 복싱인이란 점이다.
한편 필자를 안내한 진중한 성품의 이창근 심판위원은 1961년 전북 고창 출신으로 전북체고 재학시절 촉망받는 배구선수 출신이었다. 그러나 2학년 때 돌연 복싱으로 방향 전환 졸업반인 1979년 제1회 세계 청소년 선수권 선발전에 라이트 미들급으로 출전 파죽의 3연승(2KO)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 윤영복(오성체) 에 근소한 차로 판정패를 당했다.
이어진 전국선수권대회에서도 김명복 배 5연패를 달성한 관록이 묻어난 사우스포 김현호(한국체대)에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로 맞대결 초접전 끝에 3ㅡ2 판정패를 당한다. 이때 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박형춘 한국체대 감독에 의해 1980년 한국체대 4기생으로 진학한다. 그해 5월 제4회 김명복 박사배 웰터급에 출전한 이창근은 준결승에서 예리한 카운터로 동아대 김남수를 꺾고 돌풍을 일으키면서 우승을 차지한다. 김남수는 국가대표간판 오영세(수경사)를 RSC로 잡은 스펙이 뛰어난 복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 대헌 공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복싱팀 감독을 겸직한 이창근은 1989년 학생선수권 플라이급에 출전한 김세준이 고교 랭킹 1위 당곡고 곽대영을 4강전에서 꺾으며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에 진출한다. 1991년 제2회 연맹 회장배 대회에서는 대헌공고 라이트 플라이급 임덕민이 고광묵 (배재고) 을 2회 RSC로 꺾고 최우수복서(MVP) 발탁된다.
탄력을 받은 임덕민은 1992년 프레올림픽(바로셀로나) 은메달에 이어 1993년 태평양 국제대회(러시아) 우승을 차지했다. 1992년에는 이창근 사단의 밴텀급 박상민. 라이트 미들급 박정원 쌍두마차가 군림하면서 학생선수권 세계 청소년 선발전 대회에 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한다. 이창근 감독은 최우수지도자상을 받으면서 강석구(대천복싱) 심판과 함께 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세계 청소년 대회(캐나다)에 출전하였다. 이창근 심판위원은 3년전 대헌 공고 교사직을 정년퇴임 지금은 무직(?) 상태다.
부산 광무 체육관 한진흥 관장의 지도를 받은 이상우 심판은 영남 상고 재학시절 청소년 대표로 활약하면서 1980년 한중 국가대항전에 학생 대표로 출전한 경력이 있는 심판이다. 1981년 인천체대에 진학한 이상우 심판은 졸업후 지도자로 변신 부산 다선중학교 복싱팀을 맡아 5년간 지도하면서 그 짧은 기간 김정원 김기태 한상호 백승원을 비롯 수많은 명복서 들을 배출하면서 각종 전국 학생대회(중등부)에서 도합 40여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들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인 김정원은 동아대 원주시청을 거치면서 제28회 킹스컵대회(라이트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한상호는 부산체고 재학시절 아시아 청소년대회와 87회 전국체전(페더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체대에 진학 스승 이상우 심판위원의 은혜에 보은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소년체전에서 10년 만에 부산선수단에 금메달을 안겨준 김기태의 메달을 포함 소년체전에서만 5년간 알토란같은 금3. 은 1. 동 6개를 쟁취하면서 명지도자반열에 올라선 인물이 바로 이상우 심판위원이다.
특히 미남 텔런트 안보현도 손대는 일마다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이상우 심판의 미다스 손(Midis touch)을 거쳐 소년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꿈나무 대표출신 김준희와 반정훈도 이상우 심판의 손을 거쳐 탄생한 진품명품 들이다.
큰 따님이 연세대 통계학과를 졸업한 이용장 심판위원은 복싱인들중 인문학 지식(人文學知植)이 가장 뛰어난 인물중 한명이다. 이용장 심판위원은 1960년 전주태생으로 형제 복서로 유명하다. 전주 상고 재학시절 킹스컵 국가대표 이봉래( 한국체대)를 2차례 꺾은 이용장은 권현규 지택림등 정상급 복서들에게 고배를 마시면도 굴치않고 한뼘씩 성장한다.
결국 복싱에 물이 오른 1960년 61회 전국체전 밴텀급 준결승에서 1979년 청소년 대표 출신의 사우스포 강타자 김평국(경상대)을 결승전에선 김명복배 대학부 우승자 임창용(동아대)를 각각 판정으로 꺾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용장의 친형 이용선 관장은 1968년 제 49회 전국체전 동메달 리스트로 동생 이용장이 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숙소까지 4Km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온 유명한 일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당시 전국체전은 일반부 대학부 구분 없이 전 선수가 총출전한 왕중왕전으로 펼쳤기에 금메달의 무게가 남달랐던 대회로 기억된다. 1986년 꿈나무 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수많은 선수들을 조련한 이용선 관장은 1991년 국제심판(FABA)으로 활약하면서 1993년 방글라데시 감독으로 선임되어 국위를 선양한 인물이다.
1963년 4월21일 대구 태생의 정희조는 경북 체중 재학시절 전도유망한 육상 선수 출신이다. 1979년 경북체고에 입학 복싱으로 전환 1980년 대통령배 경북대표로 밴텀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주목을 받는다. 이후 국내 복싱사상 최초로 5체급에서 국가대표를 역임한 신창석을 꺾고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1987년 세계 군인선수권 대회와 한미 국가대항전을 석권 국제대회 2관왕을 달성한다.
그러나 정희조는 1982년 9월 베네주엘라에서 개최된 제1회 시몬 볼리바르컵 대회에서 푸에르 토리코 발도나도 에게 판정패를 당한 경기와 1986년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 라이트급 경기에서 전진철(원광대)에 3ㅡ2 로 패한 지난 경기는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운 경기였다. 은퇴 후 대구중 리 중학 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지도자로 변신한 정희조는 1994년 제23회 소년체전에서 코크급의 이상호 플라이급 하헌석 라이트급 변성만이 금메달 3개를 획득한다.
그리고 1997년 성서공고 감독 시절 제7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밴텀급의 이상호 라이트 웰터급의 문성만 웰터급의 김정환이 역시 3개의 금메달을 획득 기염을 토했다. 중 . 고 를 옮겨 다니면서 학원 스포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인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서 한 팀이 한 대회에서 금메달 3개씩을 획득한 이 같은 기록은 복싱 백년사에 전무후무한 불멸의 대기록이다.
끝으로 필자와 35년이 넘는 유구한 추억의 복싱 역사를 공유한 이창근 이용장 정희조 이상우 네 분의 심판위원을 지켜보면서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정렬과 투지까지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기에 오랫동안 한국복싱 발전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드리면서 이번주 스포츠 컬럼을 마무리한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