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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방콕아시안게임, '당근 정책' 뒤에 숨겨진 투혼과 배신의 기록④

25.04.1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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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정영근 관장과 사석에서 담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1947년 전북 부안태생의 정영근은 1971년 아시아 선수권도 제패하면서 국제대회 2관왕에 오른 복서였다. 은퇴 후, 그는 오성체육관을 설립 안달호, 정상도, 방윤석 등 대형 선수들을 배출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1970년 12월 태국 방콕에서 제6회 아시안게임이 개최되었다. 당시 한국이 이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북한의 도발 우려 때문에 개최권을 넘기며 반납비까지 물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결국 태국에서 개최되었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60년대 후반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운 북한이 1968년 1. 21사태,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푸에블루 납치 사건 등 연이은 도발로 촉각이 곤두서있었던 시대적 상황에 부닥쳐 있었던 시기였다.

"집 한 채 값" 포상금 약속, 선수들의 투혼을 깨우다

그 때문에 이번 기회에 스포츠를 통해 북한에 확실한 우위를 보여주고 싶었던 대회였다. 당시는 중국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이라 일본의 일방적인 독주가 펼쳐지는 가운데 한국은 태국과 2위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대회를 두 달 남겨놓은 10월 어느 날 아시안게임 단장에 선임된 장덕진 대한축구협회장이 태릉선수촌을 방문한다. 목적은 선수들의 사기를 올려 원하는 성적을 창출하기 위해 일종의 <당근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우선 일본에 이어 종합 2위를 달성해야 한다. 그리고 2위를 달성할 경우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에게 당시 집 한 채 값인 현금 100만 원을 <포상금>으로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장덕진의 이 한마디에 18세 소년 김태호부터 30세 노장 박형춘까지 11체급 대표팀 선수들에게 커다란 동기부여가 하달되면서 선수들은 결사 항전을 외치면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강훈을 시작한다.




1934년 6월 춘천태생의 장덕진은 고려대 재학시절 고시 3관왕을 달성한 수재였다. 또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사위라는 배경을 업고 농림수산부 장관에으로 임명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한 엘리트 관료였다. 대회가 열리자 11체급의 태극전사들은 7체급에서 결승에 오른다. 그리고 라이트 플라이급 김충배, 플라이급 지용주, 페더급 김성은, 라이트급 김현치, 웰터급 정영근, 라이트 미들급 박형석 등 6명이 차례로 링에 올라 모두 금메달을 획득한다. 한국의 일방적인 독주 속에 라이트 헤비급에 7번째 선수로 출전한 박형춘은 태국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상대의 버팅으로 인해 안타깝게 RSC로 패하고 말았다. 대회를 마치고 금메달을 획득하고 귀국한 선수들은 포상금 지급 소식을 마치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김현치의 분노, 프로 복싱으로의 도전장

말 그대로 탁상공론(卓上空論)에 그치고 말았다. 이때 라이트급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상을 받은 김현치는 크게 분개하면서 오랜 장고 끝에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김현치는 곧바로 조선일보 기자를 만나 얄팍한 술책으로 선수들을 우롱한 정부 당국에 일침을 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그해 11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으로 인해 사회적약자에게 여론의 동정이 기우는 상황이었다. 기자회견을 마친 김현치는 선수촌을 나와 프로행을 선언해 버린다. 그리고 일파만파로 포상금 미지급 사태가 확대되자 급기야 정부 당국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에게 200만 원 값어치에 해당하는 APT 분양권을 주는 조건을 제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방콕아시안게임은 당시 한반도 긴장 속에서 북한에 대한 우위 과시가 목적이었다. 중국이 참가하지 않아 일본, 한국, 태국이 2위를 다투던 상황에서 복싱은 한국의 자존심을 세운 종목이 됐다. 그러나 정부의 포상금 미이행은 승리의 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정영근 관장(당시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은 "목숨 걸고 훈련했지만, 약속은 종이 위에 남았다"며 당시를 회상했고, 복싱계 원로들은 "김현치의 용기가 없었다면 선수들은 끝내 보상받지 못했을 것"이라 평가한다.

김현치의 용기 있는 행동에 여러 선수가 혜택을 입은 것은 박수를 받을만한 결단이었다고 55년이 지난 지금도 원로 복싱인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후에 김현치는 동아 프로모션을 설립 박종팔, 김환진, 오민근, 서성인, 박찬영, 정종관, 유명우를 탄생시키면서 한국 복싱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스포츠의 영광 뒤에 가려진 인간적 투쟁을 조명하며, 승리보다 진실을 외친 김현치 선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