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과 마라톤,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공통 분모
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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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지난 4월 10일 한국 체육인회 걷기대회 행사가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광
장에서 열려 150여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이날 필자는 천호동에서 캡틴체육관을 운영하는 유원대학(충남 아산) 이동
포 관장과 동행 오전 10시 현장에 도착했다. 1967년 경북 안동 출신의 이
동포 관장은 전국대회 최우수지도자상을 2회 수상한 오랜 경험과 관록이
묻어난 인물이다.
한편 이곳에서 제14대 국민체육진흥공단 하형주 이사장, 허창봉 체육인
회 사무국장, 한명우 체육인 회 사무총장, 박형춘 복싱 원로회 회장, 황영
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 임형운, 최창석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 박일
천 제1회 뉴욕 월드컵 복싱 은메달리스트 등 많은 체육인들을 현장에서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허창봉 사무국장의 소개로 하형주 국민체육 진흥공단 이사장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필자가 “신숭문 선배 복싱 후뱁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에 하형주 이사장은 반색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오늘 행사장에서 만난 하형주, 한명우, 황영조 3명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독특한 이력을 보유한 스포츠 스타다.
하형주 이사장은 부산체고 2학년 때 씨름선수에서 유도로 전환, 올림픽 금
메달을 목에 걸었고 한명우 사무총장은 남산 공전에 복싱으로 입학했다가
중도에 레슬링으로 전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쟁취했다.
마지막으로 황영조 감독은 삼척 근덕중 시절 사이클 선수로 활약하다가 마
라톤으로 전환, 역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역시 인생이란 속도
가 아니라 방향이란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중 1988년 서울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1956년 충남
당진태생의 한명우는 스포츠계의 사서삼경(四書三經) 혹은 체육계의 명심
보감(明心寶鑑)이라 불리는 박학다식한 인물이다.
오늘 참석한 분 중 최연장자이자 복싱계 페스탈로치라 불리던 박형춘 전
한국체대 복싱 감독은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부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대표팀 지도자 자리를 떠날 때까지 무려 15년간 최장
수로 선수촌에 근무하면서 한국 아마복싱의 한 페이지를 묵묵히 지켜본 복
싱인이다.
잠시 후 필자는 고(故) 최요삼과 친분이 있는 황영조 감독을 마주하면서 문
득 24년 전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한 그에게 복싱 원 포인트 레슨(one
point lession)을 지도한 지난날이 생각났다.
그때 그는 생고무 같은 탄력성과 능수버들처럼 유연한 신체 구조를 지니
고 있었다. 마라톤과 프로 복싱처럼 오랫동안 끌어가며 싸워야 하는 종목
은 일단 폼이 짧고 간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체력 소모를 최소화해야 지구전(持久戰)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형의 대표적인 복서로는 유명우와 백인철을
꼽을 수 있다.
필자는 현장에서 마라톤의 황영조 감독과 박형춘 복싱 원로회 회장을 주시
하면서 두 종목의 역사와 공통점 그리고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내용을 이번
주 컬럼에서 담아보기로 했다.
한국 마라톤 초창기 역사는 손기정, 남승룡, 김은배, 권태하 등 마라톤 선각
자 4인이 1945년 12월 조선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하며 그 닻을 올렸다. 그
리고 1946년 9월 제1회 전조선 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하면서 서막이 울린
다.
이듬해 서윤복(고려대)이 1947년 제57회 보스톤 마라톤에서 대회신기록
을 세우면서 우승하는 낭보(朗報)가 날아들었다. 마라톤 1차 황금기의 서막
이었다.
3년 뒤 같은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나란히 차지하
자 한국 마라톤은 세계 무대에서 마라톤 강국으로 대접을 받는다. 이러한
기세는 58년 동경아시안게임에서 이창훈이 우승을 차지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부터 한국 마라톤 역사에서 길고 긴 24년간의 빙하기
가 찾아든다. 이러한 마라톤 암흑기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1982년 4월 정
봉수 감독과 이동찬 코오롱 회장이 마라톤 부흥을 위해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10분 벽을 깨는 선수에게 1억 원 포상금을, 15분 벽을 깨는 선수에
게 5천만 원을 지급한다는 파격적인 반전 카드를 꺼낸다. 그런 분위기에 편
승해 1982년 12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김양곤이 무려 24년 만의 마라
톤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고 금메달을 획득하며 반전에 성공한다.
당시 김양곤은 섭씨 25도 습도 80도의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달한 악천후
속에서도 일본과 북한 선수를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신문에는 <24년 만의 김양곤 쾌거 마라톤 재기 청신호>란 글이 1면
을 장식했다. 그 이면에는 이 같은 당근 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양곤
에 이어 1984년 3월에는 이홍렬이 15분 벽을 허물면서 5천만원의 포상금
을 수령한다.
이에 편승(便乘)한 협회는 1985년 마라톤 꿈나무 육성을 위한 제1회 구간
마라톤 대회를 창설하고 1987년 5월에는 코오롱그룹 마라톤팀을 창설, 마
라톤에 대한 열정을 구체화시켰다.
1988년 제4회 구간마라톤 대회에서 적토마처럼 질주하는 고교생이 혜성처
럼 등장한다. 강릉명륜고 황영조였다. 그리고 4년 후인 1992년에 벳푸 마
라톤 대회에서 황영조가 10분 벽을 깨면서 1억원 포상금을 수령 한다.
탄력을 받은 한국 마라톤은 아시안게임에서도 김원탁, 황영조, 이봉주, 지
영준 등이 금메달을 연달아 획득 제2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이때까지 이
동찬 회장이 마라톤에 투자한 돈이 40억원이었다.
한편, 한국복싱은 1934년 1월 성의경, 강낙원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천
향원에서 조선 권투연맹 발족회(發足會)를 가졌다. 그리고 48년 런던올림
픽부터 68년 멕시코 올림픽까지 한수안, 강준호, 송순천, 정신조, 지용주,
장규철이 메달을 획득하면서 복싱 강국의 면모를 과시한다.
1954년 아시안게임에서는 페더급의 김금현이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후
1981년까지 7회에 걸쳐 아시안게임 대회에 참가 모두 27개의 금메달을 수
확했다.
그리고 1982년 3월 대한 복싱협회 12대 회장으로 등장한 역사적인 인물
이 바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다. 김 회장은 1997년까지 15년간 회장직
을 수행하면서 한국복싱의 재건과 영광을 위해 어떠한 투자도 불사하겠다
란 슬로건을 내걸고 투신 한국복싱을 탈(脫) 아시아권으로 격상시킨다.
김 회장은 재임 기간 중 매년 8억원씩 지속적으로 투자하면서 각종 포상
금 23억을 별도로 지급했다. 이에 한국복싱은 잘 타고 있는 나무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화려하게 급부상했다.
이 기간 복싱에 100억을 투자한 결과, 한국복싱은 신준섭의 올림픽 최초
금메달을 포함, 도합 209개의 금메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미국, 소
련, 쿠바, 동독과 함께 세계 아마복싱 5강권 복싱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꽃의 향기는 십 리를 가고 언어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나눔의 향기는 천
리를 간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투자의 향기는 영원히 간다고 필자는
역설하고 싶다. 공교롭게도 김승연 회장의 퇴임과 맞물린 1998년 방콕아시
안게임에서 한국 복싱은 44년 만에 노골드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시점을 분기점으로 하여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오
늘에 이르렀다. 끝으로 오늘 한국 체육인 회 걷기대회 행사에 참여해 주신
모든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이번주 컬럼을 마무리한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6464ko@naver.com
장에서 열려 150여명의 인원이 참가했다.
이날 필자는 천호동에서 캡틴체육관을 운영하는 유원대학(충남 아산) 이동
포 관장과 동행 오전 10시 현장에 도착했다. 1967년 경북 안동 출신의 이
동포 관장은 전국대회 최우수지도자상을 2회 수상한 오랜 경험과 관록이
묻어난 인물이다.
한편 이곳에서 제14대 국민체육진흥공단 하형주 이사장, 허창봉 체육인
회 사무국장, 한명우 체육인 회 사무총장, 박형춘 복싱 원로회 회장, 황영
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 임형운, 최창석 대한 복싱협회 심판위원, 박일
천 제1회 뉴욕 월드컵 복싱 은메달리스트 등 많은 체육인들을 현장에서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허창봉 사무국장의 소개로 하형주 국민체육 진흥공단 이사장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필자가 “신숭문 선배 복싱 후뱁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에 하형주 이사장은 반색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오늘 행사장에서 만난 하형주, 한명우, 황영조 3명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독특한 이력을 보유한 스포츠 스타다.
하형주 이사장은 부산체고 2학년 때 씨름선수에서 유도로 전환, 올림픽 금
메달을 목에 걸었고 한명우 사무총장은 남산 공전에 복싱으로 입학했다가
중도에 레슬링으로 전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쟁취했다.
마지막으로 황영조 감독은 삼척 근덕중 시절 사이클 선수로 활약하다가 마
라톤으로 전환, 역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역시 인생이란 속도
가 아니라 방향이란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중 1988년 서울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1956년 충남
당진태생의 한명우는 스포츠계의 사서삼경(四書三經) 혹은 체육계의 명심
보감(明心寶鑑)이라 불리는 박학다식한 인물이다.
오늘 참석한 분 중 최연장자이자 복싱계 페스탈로치라 불리던 박형춘 전
한국체대 복싱 감독은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부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대표팀 지도자 자리를 떠날 때까지 무려 15년간 최장
수로 선수촌에 근무하면서 한국 아마복싱의 한 페이지를 묵묵히 지켜본 복
싱인이다.
잠시 후 필자는 고(故) 최요삼과 친분이 있는 황영조 감독을 마주하면서 문
득 24년 전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한 그에게 복싱 원 포인트 레슨(one
point lession)을 지도한 지난날이 생각났다.
그때 그는 생고무 같은 탄력성과 능수버들처럼 유연한 신체 구조를 지니
고 있었다. 마라톤과 프로 복싱처럼 오랫동안 끌어가며 싸워야 하는 종목
은 일단 폼이 짧고 간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체력 소모를 최소화해야 지구전(持久戰)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형의 대표적인 복서로는 유명우와 백인철을
꼽을 수 있다.
필자는 현장에서 마라톤의 황영조 감독과 박형춘 복싱 원로회 회장을 주시
하면서 두 종목의 역사와 공통점 그리고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내용을 이번
주 컬럼에서 담아보기로 했다.
한국 마라톤 초창기 역사는 손기정, 남승룡, 김은배, 권태하 등 마라톤 선각
자 4인이 1945년 12월 조선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하며 그 닻을 올렸다. 그
리고 1946년 9월 제1회 전조선 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하면서 서막이 울린
다.
이듬해 서윤복(고려대)이 1947년 제57회 보스톤 마라톤에서 대회신기록
을 세우면서 우승하는 낭보(朗報)가 날아들었다. 마라톤 1차 황금기의 서막
이었다.
3년 뒤 같은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나란히 차지하
자 한국 마라톤은 세계 무대에서 마라톤 강국으로 대접을 받는다. 이러한
기세는 58년 동경아시안게임에서 이창훈이 우승을 차지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부터 한국 마라톤 역사에서 길고 긴 24년간의 빙하기
가 찾아든다. 이러한 마라톤 암흑기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1982년 4월 정
봉수 감독과 이동찬 코오롱 회장이 마라톤 부흥을 위해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10분 벽을 깨는 선수에게 1억 원 포상금을, 15분 벽을 깨는 선수에
게 5천만 원을 지급한다는 파격적인 반전 카드를 꺼낸다. 그런 분위기에 편
승해 1982년 12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김양곤이 무려 24년 만의 마라
톤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고 금메달을 획득하며 반전에 성공한다.
당시 김양곤은 섭씨 25도 습도 80도의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달한 악천후
속에서도 일본과 북한 선수를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신문에는 <24년 만의 김양곤 쾌거 마라톤 재기 청신호>란 글이 1면
을 장식했다. 그 이면에는 이 같은 당근 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양곤
에 이어 1984년 3월에는 이홍렬이 15분 벽을 허물면서 5천만원의 포상금
을 수령한다.
이에 편승(便乘)한 협회는 1985년 마라톤 꿈나무 육성을 위한 제1회 구간
마라톤 대회를 창설하고 1987년 5월에는 코오롱그룹 마라톤팀을 창설, 마
라톤에 대한 열정을 구체화시켰다.
1988년 제4회 구간마라톤 대회에서 적토마처럼 질주하는 고교생이 혜성처
럼 등장한다. 강릉명륜고 황영조였다. 그리고 4년 후인 1992년에 벳푸 마
라톤 대회에서 황영조가 10분 벽을 깨면서 1억원 포상금을 수령 한다.
탄력을 받은 한국 마라톤은 아시안게임에서도 김원탁, 황영조, 이봉주, 지
영준 등이 금메달을 연달아 획득 제2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이때까지 이
동찬 회장이 마라톤에 투자한 돈이 40억원이었다.
한편, 한국복싱은 1934년 1월 성의경, 강낙원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천
향원에서 조선 권투연맹 발족회(發足會)를 가졌다. 그리고 48년 런던올림
픽부터 68년 멕시코 올림픽까지 한수안, 강준호, 송순천, 정신조, 지용주,
장규철이 메달을 획득하면서 복싱 강국의 면모를 과시한다.
1954년 아시안게임에서는 페더급의 김금현이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후
1981년까지 7회에 걸쳐 아시안게임 대회에 참가 모두 27개의 금메달을 수
확했다.
그리고 1982년 3월 대한 복싱협회 12대 회장으로 등장한 역사적인 인물
이 바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다. 김 회장은 1997년까지 15년간 회장직
을 수행하면서 한국복싱의 재건과 영광을 위해 어떠한 투자도 불사하겠다
란 슬로건을 내걸고 투신 한국복싱을 탈(脫) 아시아권으로 격상시킨다.
김 회장은 재임 기간 중 매년 8억원씩 지속적으로 투자하면서 각종 포상
금 23억을 별도로 지급했다. 이에 한국복싱은 잘 타고 있는 나무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화려하게 급부상했다.
이 기간 복싱에 100억을 투자한 결과, 한국복싱은 신준섭의 올림픽 최초
금메달을 포함, 도합 209개의 금메달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미국, 소
련, 쿠바, 동독과 함께 세계 아마복싱 5강권 복싱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꽃의 향기는 십 리를 가고 언어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나눔의 향기는 천
리를 간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투자의 향기는 영원히 간다고 필자는
역설하고 싶다. 공교롭게도 김승연 회장의 퇴임과 맞물린 1998년 방콕아시
안게임에서 한국 복싱은 44년 만에 노골드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 시점을 분기점으로 하여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오
늘에 이르렀다. 끝으로 오늘 한국 체육인 회 걷기대회 행사에 참여해 주신
모든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이번주 컬럼을 마무리한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6464k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