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복서 대학 진학 위해 '대회출전 포기' 미담 주인공 장흥민
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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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번 주 스포츠 칼럼의 주인공은 한국체대 2회 졸업생 장흥민이다.
1957년 10월 23일 부산태생인 그는 복싱 명문 한영고 한국체대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풍부한 경험을 살린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대표팀에 승선(乘船)한 왼손잡이 복서다.
1974년 3월 동대문구 에 위치한 경흥 체육관(관장 윤창수)에서 복싱을 수련한 장흥민은 당시 복싱 명문 한영고에 입학을 위해 서대문에 위치한 연성 기계공고를 중퇴하고 1975년 한영고에 재입학 하였다. 당시 한영고는 박찬희 김인창 이필구 양설석 장한곤 김종선 김종원등 기라성 (綺羅星) 같은 아마츄어 복서들이 포진된 복싱 명문고였기 때문이다. 장흥민은 그해 7월 제7회 학생 신인 선수권(코크급) 결승에서 서울체고 김철규를 판정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1976년 한영고 2학년에 진학한 장흥민은 4월 대통령배 서울시 선발전(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 결승에서 김철규를 판정으로 제압한다.
이어진 6월 제26회 학생선수권 결승에서 또다시 김철규와 맞대결한 장흥민은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다.
1977년 복싱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20살 청년 장흥민은 제1회 김명복 박사 배와 대통령 배 우승을 연거푸 차지하면서 2관왕을 달성한다.
특히 대통령배 결승에서는 국가대표 마수년을 꺾으며 돌풍을 일으킨 경기는 압권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성한 장흥민은 그해 9월 제27회 학생선수권 대회가 열리자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선수촌을 나와 한영고팀 전용훈련장인 경흥 체육관에서 훈련한다.
당시 한영고에는 에이스 장흥민을 비롯 페더급의 김종선 미들급의 장한곤이 포진되어 있어 단체 종합우승이 유력한 팀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경 흥 체육관을 불쑥 방문한다. 방문객은 뜻밖에도 장흥민에 3연패를 당한 서울체고 김철규였다.
사슴이 맹수를 경계하듯 실력에서 밀린 김철규의 방문 목적은 단 하나였다. 김철규 그는 장흥민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1등 상장이 단 하나도 없어 한국체대에 들어갈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시합에 랭킹 1위 장흥민이 출전하지 말아달라란 요지(要旨)의 부탁을 하기 위해 방문을 한 것이다.
그때 김철규의 간청에 장흥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부상을 핑계로 출전 거부를 선언하고 짐을 챙겨 선수촌으로 복귀하고 만다. 사실 부탁도 하는 사람이 힘이 있으면 강요가 되지만 힘이 없으면 무시를 당하는 법이다, 그러나 장흥민은 최대한 관용을 베풀면서 경기 출전을 포기한다. 중요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김철규와 장흥민은 두 사람은 친분이 없는 관계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장흥민은 김철규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유연한 입장에서 약자에게 소리소문없이 관용을 베풀었다.
결국 장흥민의 탈퇴로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씨앗이 솟아오른 서울체고 김철규는 무주공산(無主空山)에 무혈입성 가볍게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체대행을 예약한다. 1978년 장흥민 김철규 두 복서는 사이좋게 한국체대에 입학한다.
이들은 박형춘 한국체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제2회 김명복 박사배에 출전 라이트 플라이급과 플라이급에서 함께 우승을 차지한다.
그후 장흥민은 박인태 홍진호 오인석에서 패하면서 부침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잦은 패배 속에서도 살아있는 실패작은 죽은 걸작(傑作)보다 더낫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하고 훈련에 끊임없이 매진한다.
그리고 1979년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컵 대회에 장흥민은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출전을 못하게 된다. 그때 장흥민의 대타로 국가대표로 출전한 선수가 바로 김철규였다.
장흥민은 그해 전국체전에서 인천체전 복싱 역사상 전무후무한 3관왕을 달성한 조종득을 2회 53초 만에 4차례 다운을 탈취하면서 RSC로 제압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해 벌어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강철처럼 강하고 생고무처럼 질긴 투혼이 집대성되어 높고 험하기만 했던 장정구 홍진호 홍동식 박대천 등 장벽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당당하게 출전권을 획득 대미를 장식한다.
이들은 대학 졸업 후 김철규는 대구 경신고 체육 교사로 장흥민은 안동공고 체육 교사로 각각 사이좋게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 현재는 모두 퇴직하고 인생 3막을 연금을 받으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장흥민은 수년전 한국체대 박형춘 감독 선생의 팔순 잔치에 참석 4년간 자신을 지도 감독한 스승의 은혜에 백만 원을 쾌척 사제지간의 케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양보의 미덕 그리고 나눔과 베품의 미학을 몸소 실천한 이 시대 진정한 의인(義人) 장흥민 그런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 못지않게 더욱더 자랑스럽다.
인생 3막을 경북 안동에서 평강(平康)하게 지내는 그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1957년 10월 23일 부산태생인 그는 복싱 명문 한영고 한국체대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풍부한 경험을 살린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대표팀에 승선(乘船)한 왼손잡이 복서다.
1974년 3월 동대문구 에 위치한 경흥 체육관(관장 윤창수)에서 복싱을 수련한 장흥민은 당시 복싱 명문 한영고에 입학을 위해 서대문에 위치한 연성 기계공고를 중퇴하고 1975년 한영고에 재입학 하였다. 당시 한영고는 박찬희 김인창 이필구 양설석 장한곤 김종선 김종원등 기라성 (綺羅星) 같은 아마츄어 복서들이 포진된 복싱 명문고였기 때문이다. 장흥민은 그해 7월 제7회 학생 신인 선수권(코크급) 결승에서 서울체고 김철규를 판정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1976년 한영고 2학년에 진학한 장흥민은 4월 대통령배 서울시 선발전(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 결승에서 김철규를 판정으로 제압한다.
이어진 6월 제26회 학생선수권 결승에서 또다시 김철규와 맞대결한 장흥민은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다.
1977년 복싱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20살 청년 장흥민은 제1회 김명복 박사 배와 대통령 배 우승을 연거푸 차지하면서 2관왕을 달성한다.
특히 대통령배 결승에서는 국가대표 마수년을 꺾으며 돌풍을 일으킨 경기는 압권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성한 장흥민은 그해 9월 제27회 학생선수권 대회가 열리자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선수촌을 나와 한영고팀 전용훈련장인 경흥 체육관에서 훈련한다.
당시 한영고에는 에이스 장흥민을 비롯 페더급의 김종선 미들급의 장한곤이 포진되어 있어 단체 종합우승이 유력한 팀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경 흥 체육관을 불쑥 방문한다. 방문객은 뜻밖에도 장흥민에 3연패를 당한 서울체고 김철규였다.
사슴이 맹수를 경계하듯 실력에서 밀린 김철규의 방문 목적은 단 하나였다. 김철규 그는 장흥민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1등 상장이 단 하나도 없어 한국체대에 들어갈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시합에 랭킹 1위 장흥민이 출전하지 말아달라란 요지(要旨)의 부탁을 하기 위해 방문을 한 것이다.
그때 김철규의 간청에 장흥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부상을 핑계로 출전 거부를 선언하고 짐을 챙겨 선수촌으로 복귀하고 만다. 사실 부탁도 하는 사람이 힘이 있으면 강요가 되지만 힘이 없으면 무시를 당하는 법이다, 그러나 장흥민은 최대한 관용을 베풀면서 경기 출전을 포기한다. 중요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김철규와 장흥민은 두 사람은 친분이 없는 관계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장흥민은 김철규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유연한 입장에서 약자에게 소리소문없이 관용을 베풀었다.
결국 장흥민의 탈퇴로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씨앗이 솟아오른 서울체고 김철규는 무주공산(無主空山)에 무혈입성 가볍게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체대행을 예약한다. 1978년 장흥민 김철규 두 복서는 사이좋게 한국체대에 입학한다.
이들은 박형춘 한국체대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제2회 김명복 박사배에 출전 라이트 플라이급과 플라이급에서 함께 우승을 차지한다.
그후 장흥민은 박인태 홍진호 오인석에서 패하면서 부침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잦은 패배 속에서도 살아있는 실패작은 죽은 걸작(傑作)보다 더낫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하고 훈련에 끊임없이 매진한다.
그리고 1979년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컵 대회에 장흥민은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출전을 못하게 된다. 그때 장흥민의 대타로 국가대표로 출전한 선수가 바로 김철규였다.
장흥민은 그해 전국체전에서 인천체전 복싱 역사상 전무후무한 3관왕을 달성한 조종득을 2회 53초 만에 4차례 다운을 탈취하면서 RSC로 제압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해 벌어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강철처럼 강하고 생고무처럼 질긴 투혼이 집대성되어 높고 험하기만 했던 장정구 홍진호 홍동식 박대천 등 장벽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당당하게 출전권을 획득 대미를 장식한다.
이들은 대학 졸업 후 김철규는 대구 경신고 체육 교사로 장흥민은 안동공고 체육 교사로 각각 사이좋게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 현재는 모두 퇴직하고 인생 3막을 연금을 받으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장흥민은 수년전 한국체대 박형춘 감독 선생의 팔순 잔치에 참석 4년간 자신을 지도 감독한 스승의 은혜에 백만 원을 쾌척 사제지간의 케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양보의 미덕 그리고 나눔과 베품의 미학을 몸소 실천한 이 시대 진정한 의인(義人) 장흥민 그런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 못지않게 더욱더 자랑스럽다.
인생 3막을 경북 안동에서 평강(平康)하게 지내는 그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