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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싱의 영웅, 송순천과 그의 두 제자 임재근 vs 정영찬의 이야기③

25.04.03 27

본문

파이터 복싱의 교본

겸손의 미학과 철학


태성 체육관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故송순천 교수

1950년대 한국스포츠 최고의 스타는 이견이 없는 최초의 올림픽(복싱) 은메달 故 송순천 용인대 교수다. 50년대 한국스포츠 최고의 인기종목은 마라톤 종목이었다. 한국 마라톤은 1950년 4월 54회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나란히 1.2.3 등을 차지 한국 마라톤 최절정기를 이뤄놓았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과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최윤칠과 이창훈이 월계관을 노렸지만 각각 4위에 머무는 불운이 겹쳐 메달 획득에 실패하였다. 이 무렵 올림픽 무대 마라톤에서 이루지 못한 메달 갈증의 아쉬움을 시원하게 해갈 시켜준 인물이 탄생한다. 주인공은 1956년 12월 6일 제16회 지구촌 최대의 축제 잔치인 멜버른 올림픽에 혜성처럼 등장, 결승전에 진출한 22살의 초인(超人) 송순천 선수다.

그는 7차례에 걸쳐 치러진 국내 평가전에서 기록적인 37전 전승을 거두고 129일 만에 올림픽 대표(밴텀급)로 출전 본선에서 4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납득 할 수 없는 편파 판정에 의해 동독 선수에게 3ㅡ2 로 억울한 판정패를 당했지만, 천금 같은 은메달을 획득 당시 외국으로부터 식량원조와 차관으로 연명하던 최빈국 대한민국의 국위를 크게 선양했다, 훗날 송순천 교수의 체육관(한국체) 대학(경희대) 후배이자 프로복싱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는 사석에서 필자에게 보디웍과 헤드웍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화염방사기처럼 맹폭을 퍼붓는 송순천 선배의 복싱 스타일은 한마디로 <파이터 복싱의 교본>이라는 격찬하였다. 송순천은 1969년 미호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청주시 탑동에 태성 체육관을 설립한다.




강타자 임재근 vs 천재 정영찬

대구 복싱의 선구자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불후의 명작(名作)을 발표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화 선생이라면 청주 복싱의 효시(嚆矢)는 송순천 교수였다. 이곳에서 송순천은 2명의 걸출한 국가대표 복서 2명을 탄생시킨다. 라이트 미들급의 임재근과 웰터급의 정영찬이 주인공이다. 강타자 임재근이 1972년 제 53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그해 뮌헨 올림픽 본선에 국가대표로 출전 세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2선으로 밀려난 정영찬이란 복서가 홍수환 챔프를 비롯해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복싱사상 최고의 천재 복서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정영찬은 청주에서 예식장을 포함 레스토랑과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금수저 가정에서 태어났다. 정영찬은 청주태성 체육관에서 송순천 교수의 지도로 1971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웰터급)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복싱의 미래로 주목을 받는다. 173Cm의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동체시력(動體視力)으로 72년 뮌헨 올림픽 4차 선발전에서 아시아 선수권자 황영일(군산체육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송순천 교수는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할 차세대 유력한 후보로 그를 지목하고 있었다. 정영찬은 커버링이 필요 없는 복서였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 출신의 장흥민의 전언에 의하면 상대의 주먹을 특유의 감각으로 무력화시키면서 반격을 가하는 정영찬의 복싱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메이웨더급 테크니션이었다. 복싱의 4S(Speed.Sence.Skill.Strategy) 재능을 퍼펙트하게 보유한 정영찬 그는 안타깝게도 지나치게 풍족한 환경 때문인지 훈련에 집중하지 않는 게으른 천재였다.

영광과 아쉬움 뒤에 남은 유산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에서도 그는 국가대표 간판 박태식과 김주석에 원사이드하게 경기를 펼치다가 종반 체력 저하로 판정패 출전권을 연거푸 상실하였다. 만일 그가 복싱에 전력투구하는 열정을 보유했다면 스승 송순천 교수의 금메달의 맺힌 한을 풀어줄 틀림없는 최적임자였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정영찬은 1980년 청주복싱 유망주 홍기호에게 매달 10만 원씩 후원금을 전달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조력자로 변신하였다. 송순천 교수는 생전에 필자에게 임재근과 정영찬 선수의 복싱 스타일과 지도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투타임. 동양 J, 미들급 챔피언 임재근은 아마 전적 24승(21KO) 3패. 프로에 들어와서도 29전 23승(19KO) 1무 5패를 기록한 강타자다. 나는 세기가 다소 부족한 그의 테크닉을 교정하는 대신 그의 강점인 파괴력을 증폭시키는데 심혈을 쏟았다. 그리고 정영찬은 파괴력은 부족했지만, 복싱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나는 그에게 부족한 펀치력을 강화하는 훈련보다는 그의 강점인 신출귀몰한 테크닉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스승의 지도 철학

동물의 세계에서도 뿔이 있는 소는 날카로운 이빨이 없고 이빨이 날카로운 호랑이는 뿔이 없다. 이처럼 복서들에게도 이런 장단점을 파악 각자의 장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송순천 교수는 선수들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일선에서 선수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지도자분들께서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송순천과 두 제자의 이야기는 승리보다 열정과 헌신이 진정한 스포츠 정신임을 일깨워 준다. 그들의 유산은 여전히 현장에서 메달을 꿈꾸는 선수들에게 영감이 되고 있다. 평생을 겸손함을 삶의 철학으로 삼으시면서 후학들을 지도한 송순천 교수님과 제자들의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이번 주 스포츠 칼럼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