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 꿈 접고 프로 전향 아시아선수권 금 김의진
2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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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복싱에 입문한지 어느덧 반세기에 근접한 세월이 화살처럼 흘러갔다. 이번 주 칼럼의 주인공은 그 긴 세월 동안 늘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고락을 공유한 제10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절친 김의진이다.
김의진은 1963년 3월18일 완주군 출신으로 1979년 군산제일고에 입학 김완수 관장의 지도로 복싱을 배웠다.
1931년 매죽헌 성삼문, 백야 김좌진, 만해 한용운 선생의 탄생지인 충남 홍성태생의 김완수 관장은 중앙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학사복서 출신이었다.
이분은 복싱계 도덕군자로 불리면서 60년대 초반 군산체육관을 개설 수많은 명복서 들을 배출 전북 최초로 1968년 제6회 대한민국 체육상을 수상한 명망 높은 지도자였다.
군산대학 재학시절 김의진
180Cm의 훤칠한 키에서 뿜어내는 위력적인 스트레이트로 무장한 김의진은 1980년 8월 남원체육관과 교류전 친선 스파링을 펼친다. 상대는 훗날 대한민국 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남원 농고 2학년 신준섭이었다.
신준섭은 김의진의 강타에 실신 링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다.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체육관 화장실에 망연자실 앉아있었을 정도로 천부적으로 펀치의 위력은 대단했다. 졸업반인 1981년 라이트 미들급에 출전한 김의진은 제5회 김명복 배 제62회 전국체전 라이트 미들급에서 2관왕을 차지한다.
그러나 미들급에 출전한 동시대 라이벌 신준섭은 김명복배 전국체전 제36회 전국 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 3개를 획득 김의진에 비해 한걸음 더딘 출발을 하였다.
1982년 1월 학원스포츠를 평정한 김의진은 성인 무대를 점령하기 위해 제5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표선발전에 출전 4강전에서 동국대 김수영을 꺾고 결승에 진출 최우진(원광대)에 판정패를 당한다.
최우진은 1981년 제4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은메달 제2회 캐나다 월드컵대회 동메달을 획득한 간판 복서였다. 그해 2월 고교졸업 후 교수 자리를 제공(提供)받는 조건으로 김의진은 군산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3월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 선수권(5월 서독)파견 결승에서 최우진과 복수혈전을 벌여 2회 35초 만에 KO 승을 거두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다. 그해 4월 제8회 킹스컵대회에 처녀 출전한 김의진은 인도의 체틀리에게 경험 부족으로 2ㅡ3 판정패한다.
이어 10월 김의진은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이 대회는 지난 1965년 제2회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를 한후 17년 만에 서울에서 열리는 뜻깊은 대회였다.
김의진은 준결승전에서 일본 대표 이와사키를 초반부터 위력적인 강펀치로 두들기며 공이 울린지 불과 83초 만에 KO 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파키스탄의 니아즈를 잡고 올라온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한 태국의 시라콘이었다. 이대결에서 김의진은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3회 1분 20초 만에 역시 가볍게 R.S.C승을 거두고 그의 주먹이 국제무대에서도 통함을 증명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며칠 후 청와대를 예방한 김의진을 비롯한 7명의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단은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150만씩 격려금을 받았다.
여담이지만 지난 1965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군산체육관은 서상영 황영일 박 구일이 출전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17년 만에 서울에서 다시 개최된 10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군산체육관 출신 김의진 김현호가 또다시 금메달을 획득 기염을 토했다. 이 같은 실적은 지방 소도시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진기록이다. 그 중심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완수 관장이 계셨다.
한편 8월에 벌어진 뉴델리 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에서 김의진은 군산체육관 강영한을 꺾고 결승에 선착 서울체고 이해정과 맞대결한다.
이해정은 강영한과 선발전에서 한차례 맞대결 패한 적이 있는 복서여서 김의진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이해정이 판정승을 거둔다.
여담이지만 1956년 군산태생의 강영한은 85년 월드컵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천적 안달호에게 4연패를 당했지만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홍기호 이해정을 연파한 승부사 기질이 강한 복서였다.
중요한 사실은 대표팀에서 탈락한 김의진은 이때부터 바위처럼 단단했던 멘탈이 진훍처럼 물컹해지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그해 10월 김의진은 신준섭과 함께 제5회 핀란드 국제복싱 대회에 출전 모두 소련 선수에게 패하면서 동메달에 머문다.
귀국한 신준섭 김의진 두 선수가 얼마 후 군산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두 선수가 펼쳤던 40년이 훌쩍 지난 그들의 스파링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재현되어 뇌리에 떠오른다.
김의진은 이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방황을 시작한다. 1983년 10월 김의진은 제64회 전국체전에 미들급으로 출전 4강전에서 충남 대표 이영기를 결승전에선 전남 대표 장성호를 각각 판정으로 잡고 금메달을 획득 슬럼프에 마침표를 찍고 부활에 성공한다.
그날이 1983년 10월 10일이었다. 바로 그날 40세의 극동 프로모션 심영자 후원회장이 필자를 비롯 황동용 김의진을 비롯한 군산팀 선수 4명을 창단 예정인 88 프로모션 창단멤버로 스카웃 하기 위해 김철호 챔프를 비롯 관계자들과 인천 복싱경기장에 나타났다.
황화강의 발원지(發源地)가 강서성 의 조그만 개울물에서 시작했듯이 훗날 복싱판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88 프로모션창업도 그녀의 미세한 발걸음에서 그렇게 서막이 울려 퍼졌다.
김의진은 65전 58승(46KO) 7패의 전적을 뒤로하고 1984년 3월 17일 88 프로모션이 개최한 첫 대회에 메인 경기로 출전 필리핀의 월리엄 마디존에 8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대뷔전을 장식한다.
3개월 후 김의진은 문화체육관에서 노창환과 KBC 미들급 타이틀전을 펼쳐 2회 노창환에게 결정타를 성공 KO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가는등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종반 노창환의 노련한 경기 운영에 말려 10회 판정패를 당한다.
한국 타이틀전에서 김봉철에 3회 KO승을 거두는 김의진
1986년 11월1일 김의진은 극동 서부 김봉철과 한국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3회 KO승을 거두면서 4연승(3KO)을 질주 제25대 KBC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김의진에 KO패 당한 김봉철은 1980년 제12회 전국 우승권 선수권대회 미들급 선수권자였다.
그후 1981년 5월 전국 선수권 미들급 결승에서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우광식(단국대)을 꺾으며 돌풍을 일으킨 국가대표 김창준(원주복싱)과 맞대결 군말 없는 판정으로 꺾은 복서가 바로 김봉철이었다.
이런 화려한 커리어를 보유한 김봉철은 1982년 5월 프로에 전향 동양 챔피언을 지낸 이왕섭 김복렬과 1승1무 한국 챔피언을 지낸 장종배 (동아)를 한 차례씩 격파한 전도유망한 복서였다.
하지만 김의진과 국내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묵직한 강타에 총 맞은 노루처럼 쓰러지면서 안타깝게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김봉철과 대결을 변곡점(變曲點) 삼아 이제 물오른 프로복싱의 달콤한 주먹맛의 촉감을 느낀 23살의 김의진은 이제 그의 시대가 화려하게 펼쳐질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주일 후 징집영장을 받고 곧바로 입대한다.
아시아 선수권 우승으로 군산대 교수직 보장과 함께 병역 특례혜택을 받았던 그였지만 프로로 전향하면서 모든 혜택이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던것이다.
결국 2년의 세월이 흘러 88년 11 월 이환복과 경기를 치뤄 3회 KO 승을 거두고 김의진은 링을 떠났다. 9전 7승(4KO) 2패의 전적을 끝으로 링을 떠난 김의진은 1990년 제주도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개인사업(건설업)을 하면서 군산체육관 후배이자 1993년 제1회 동아시아대회(상해)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인 김장섭 서귀포 복싱협회 부회장, 그리고 볼리바르 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황동룡,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베스트 복서 진행범 등 제주도에 정착한 동료 선후배 복싱인들과 어우러져 여생을 즐기고 있다.
수년전 코로나 위기에 봉착한 필자에게 한달치 월세를 보내 주면서 따스한 인간미를 전달한 김의진 그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던 지난날 인생 황금기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프로행을 선택 유무형의 상당한 가치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난 과거를 아쉬워하지도 않고 미련도 후회도 없다고 담담하게 회고했다.
현재 제주도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면서 찬란한 것은 순간을 위한 것이지만 참된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전직 국가대표 복싱선수 김의진 그의 안녕을 빈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 6464ko@naver.com
출처 : 뉴스프리존(https://www.newsfreezone.co.kr)
김의진은 1963년 3월18일 완주군 출신으로 1979년 군산제일고에 입학 김완수 관장의 지도로 복싱을 배웠다.
1931년 매죽헌 성삼문, 백야 김좌진, 만해 한용운 선생의 탄생지인 충남 홍성태생의 김완수 관장은 중앙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학사복서 출신이었다.
이분은 복싱계 도덕군자로 불리면서 60년대 초반 군산체육관을 개설 수많은 명복서 들을 배출 전북 최초로 1968년 제6회 대한민국 체육상을 수상한 명망 높은 지도자였다.
군산대학 재학시절 김의진
180Cm의 훤칠한 키에서 뿜어내는 위력적인 스트레이트로 무장한 김의진은 1980년 8월 남원체육관과 교류전 친선 스파링을 펼친다. 상대는 훗날 대한민국 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남원 농고 2학년 신준섭이었다.
신준섭은 김의진의 강타에 실신 링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다.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체육관 화장실에 망연자실 앉아있었을 정도로 천부적으로 펀치의 위력은 대단했다. 졸업반인 1981년 라이트 미들급에 출전한 김의진은 제5회 김명복 배 제62회 전국체전 라이트 미들급에서 2관왕을 차지한다.
그러나 미들급에 출전한 동시대 라이벌 신준섭은 김명복배 전국체전 제36회 전국 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 3개를 획득 김의진에 비해 한걸음 더딘 출발을 하였다.
1982년 1월 학원스포츠를 평정한 김의진은 성인 무대를 점령하기 위해 제5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표선발전에 출전 4강전에서 동국대 김수영을 꺾고 결승에 진출 최우진(원광대)에 판정패를 당한다.
최우진은 1981년 제4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은메달 제2회 캐나다 월드컵대회 동메달을 획득한 간판 복서였다. 그해 2월 고교졸업 후 교수 자리를 제공(提供)받는 조건으로 김의진은 군산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3월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 선수권(5월 서독)파견 결승에서 최우진과 복수혈전을 벌여 2회 35초 만에 KO 승을 거두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다. 그해 4월 제8회 킹스컵대회에 처녀 출전한 김의진은 인도의 체틀리에게 경험 부족으로 2ㅡ3 판정패한다.
이어 10월 김의진은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이 대회는 지난 1965년 제2회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를 한후 17년 만에 서울에서 열리는 뜻깊은 대회였다.
김의진은 준결승전에서 일본 대표 이와사키를 초반부터 위력적인 강펀치로 두들기며 공이 울린지 불과 83초 만에 KO 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파키스탄의 니아즈를 잡고 올라온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한 태국의 시라콘이었다. 이대결에서 김의진은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3회 1분 20초 만에 역시 가볍게 R.S.C승을 거두고 그의 주먹이 국제무대에서도 통함을 증명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며칠 후 청와대를 예방한 김의진을 비롯한 7명의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단은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150만씩 격려금을 받았다.
여담이지만 지난 1965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군산체육관은 서상영 황영일 박 구일이 출전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17년 만에 서울에서 다시 개최된 10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군산체육관 출신 김의진 김현호가 또다시 금메달을 획득 기염을 토했다. 이 같은 실적은 지방 소도시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진기록이다. 그 중심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완수 관장이 계셨다.
한편 8월에 벌어진 뉴델리 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에서 김의진은 군산체육관 강영한을 꺾고 결승에 선착 서울체고 이해정과 맞대결한다.
이해정은 강영한과 선발전에서 한차례 맞대결 패한 적이 있는 복서여서 김의진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이해정이 판정승을 거둔다.
여담이지만 1956년 군산태생의 강영한은 85년 월드컵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천적 안달호에게 4연패를 당했지만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홍기호 이해정을 연파한 승부사 기질이 강한 복서였다.
중요한 사실은 대표팀에서 탈락한 김의진은 이때부터 바위처럼 단단했던 멘탈이 진훍처럼 물컹해지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그해 10월 김의진은 신준섭과 함께 제5회 핀란드 국제복싱 대회에 출전 모두 소련 선수에게 패하면서 동메달에 머문다.
귀국한 신준섭 김의진 두 선수가 얼마 후 군산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두 선수가 펼쳤던 40년이 훌쩍 지난 그들의 스파링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재현되어 뇌리에 떠오른다.
김의진은 이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방황을 시작한다. 1983년 10월 김의진은 제64회 전국체전에 미들급으로 출전 4강전에서 충남 대표 이영기를 결승전에선 전남 대표 장성호를 각각 판정으로 잡고 금메달을 획득 슬럼프에 마침표를 찍고 부활에 성공한다.
그날이 1983년 10월 10일이었다. 바로 그날 40세의 극동 프로모션 심영자 후원회장이 필자를 비롯 황동용 김의진을 비롯한 군산팀 선수 4명을 창단 예정인 88 프로모션 창단멤버로 스카웃 하기 위해 김철호 챔프를 비롯 관계자들과 인천 복싱경기장에 나타났다.
황화강의 발원지(發源地)가 강서성 의 조그만 개울물에서 시작했듯이 훗날 복싱판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한 88 프로모션창업도 그녀의 미세한 발걸음에서 그렇게 서막이 울려 퍼졌다.
김의진은 65전 58승(46KO) 7패의 전적을 뒤로하고 1984년 3월 17일 88 프로모션이 개최한 첫 대회에 메인 경기로 출전 필리핀의 월리엄 마디존에 8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대뷔전을 장식한다.
3개월 후 김의진은 문화체육관에서 노창환과 KBC 미들급 타이틀전을 펼쳐 2회 노창환에게 결정타를 성공 KO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가는등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종반 노창환의 노련한 경기 운영에 말려 10회 판정패를 당한다.
한국 타이틀전에서 김봉철에 3회 KO승을 거두는 김의진
1986년 11월1일 김의진은 극동 서부 김봉철과 한국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3회 KO승을 거두면서 4연승(3KO)을 질주 제25대 KBC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김의진에 KO패 당한 김봉철은 1980년 제12회 전국 우승권 선수권대회 미들급 선수권자였다.
그후 1981년 5월 전국 선수권 미들급 결승에서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우광식(단국대)을 꺾으며 돌풍을 일으킨 국가대표 김창준(원주복싱)과 맞대결 군말 없는 판정으로 꺾은 복서가 바로 김봉철이었다.
이런 화려한 커리어를 보유한 김봉철은 1982년 5월 프로에 전향 동양 챔피언을 지낸 이왕섭 김복렬과 1승1무 한국 챔피언을 지낸 장종배 (동아)를 한 차례씩 격파한 전도유망한 복서였다.
하지만 김의진과 국내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묵직한 강타에 총 맞은 노루처럼 쓰러지면서 안타깝게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김봉철과 대결을 변곡점(變曲點) 삼아 이제 물오른 프로복싱의 달콤한 주먹맛의 촉감을 느낀 23살의 김의진은 이제 그의 시대가 화려하게 펼쳐질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주일 후 징집영장을 받고 곧바로 입대한다.
아시아 선수권 우승으로 군산대 교수직 보장과 함께 병역 특례혜택을 받았던 그였지만 프로로 전향하면서 모든 혜택이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던것이다.
결국 2년의 세월이 흘러 88년 11 월 이환복과 경기를 치뤄 3회 KO 승을 거두고 김의진은 링을 떠났다. 9전 7승(4KO) 2패의 전적을 끝으로 링을 떠난 김의진은 1990년 제주도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개인사업(건설업)을 하면서 군산체육관 후배이자 1993년 제1회 동아시아대회(상해)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인 김장섭 서귀포 복싱협회 부회장, 그리고 볼리바르 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황동룡,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베스트 복서 진행범 등 제주도에 정착한 동료 선후배 복싱인들과 어우러져 여생을 즐기고 있다.
수년전 코로나 위기에 봉착한 필자에게 한달치 월세를 보내 주면서 따스한 인간미를 전달한 김의진 그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던 지난날 인생 황금기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프로행을 선택 유무형의 상당한 가치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난 과거를 아쉬워하지도 않고 미련도 후회도 없다고 담담하게 회고했다.
현재 제주도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면서 찬란한 것은 순간을 위한 것이지만 참된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전직 국가대표 복싱선수 김의진 그의 안녕을 빈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 6464ko@naver.com
출처 : 뉴스프리존(https://www.newsfreez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