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 도전 끝에 첫 우승, 잡초 복서 국가대표 신동길⓶
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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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불굴의 도전과 첫 우승
신동길 관장의 인생과 업적 정리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경기장면 신동길(우측)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경기장면 신동길(우측)
지난주 용복회(용인대 복싱 동문회) 운영위원장 조성관 후배의 추천으로 용인일보에 컬럼을 연재, 2회째를 맞이한다. 이번 주 컬럼의 주인공은 현재 서산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플라이급) 국가대표 신동길이다. 필자가 그와 처음 인연을 맺을 때가 1989년 8월 전국 회장기대회 대회였다. 당시 필자가 지휘봉을 잡은 용산공고팀의 플라이급 백달근의 8강전 상대가 바로 충남 예산 대흥고 3학년 신동길이었다. 경기를 앞두고 전력 분석을 위해 지난 그의 기록을 훑어본 필자는 깜짝 놀랐다. 1971년생인 신동길은 지난 88년 대흥고를 졸업할 때까지 각종 대회에 8차례나 출전하였으나, 단 하나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한 복서였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그는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89년 다시 3학년에 유급생 신분으로 복학했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학 진학을 하고 싶은 용광로(鎔鑛爐)보다 뜨거운 열망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89년 그해 2차례 전국대회에서 2차례 출전했지만, 8강에서 연달아 탈락 이번 대회가 11번째 메달 도전이었다. 그러나 신동길은 용산공고 1학년 백달근에 보기 좋게 판정패를 당하며 또다시 쓴잔을 마셨다, 이제 9월에 개최되는 마지막 대회(우승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신동길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자세가 아닌 마치 황산벌 전투에 국운을 걸고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로 임하는 계백장군처럼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메달 사냥에 도전한다. 결국 신동길은 4게임 연속 R.S.C 승을 거두면서 복싱을 시작한 지 <3년 4개월> 만에 감격 적인 첫 우승을 차지한다.
대학 시절, 역전의 시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나고 자란 충남 예산은 필자의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수록된 백제 부흥 운동의 시발(始發)점이었던 임존성이 있는 고장이다. 바로 그곳에서 흑치상지 장군이 백제 유민을 이끌고 나. 당 연합군과 투쟁한 기간이 공교롭게도 신동길의 정상 도전 기간과 동일한 <3년 4개월>이었다. 한편, 이때 심판석에서 매의 눈으로 우승을 차지한 그의 경기를 예의주시한 관계자가 있었다. 바로 경희대학 양행석 복싱 감독이었다. 결국 그분에 의해 신동길은 특기생으로 발탁되어 경희대로 진학한다. 90년 경희대에 진학한 신동길은 2년 동안 각종 선발전에서 임덕민(서원대) 박형연(용인대) 이해준(한체대) 김진수(서울시청) 등 4명의 선수에게 기록적인 7연패를 당한다.
1993년 경희대 3학년에 올라서면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신동길은 훈련에 매진 그해 동아시아 대회 은메달 남기춘(경희대)과 이광호(원광대) 서울컵 은메달 이해준(한국체대) 등을 차례로 꺾고 전국체전을 포함 4관왕을 달성한다. 그리고 졸업반인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 8강에서 올림픽(애틀랜타) 대표 출신 배기웅(한국체대)을. 4강전에서 93년 제7회 세계 선수권(핀란드) 국가대표 이근식(한국체대). 결승전에서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전인덕 (원주시청)을 차례로 제압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대미를 장식하고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그러나 신동길은 본선 8강에서 일본의 나까조노 선수와 맞대결 주도권을 잡고 경기를 우세하게 펼쳤지만 지독한 홈 텃세에 밀려 메달권에서 억울한 판정패를 당한다.
프로 전향과 은퇴 후 기여
경희대를 졸업하고 청양군청에 입단한 신동길은 물오른 원숙미를 자랑하며 96년 97년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한다. 그리고 75전 60승 (32KO. RSC) 15패의 전적을 남기고 박수를 받으며 링을 떠난다. 잡초 복서 신동길은 2000년 노화에 따른 기량 저하(Aging Curve)를 그리는 30살이 되어 신도체육관 소속으로 프로에 전향 KBC(한국 권투위원회) 플라이급 슈퍼플라이급에서 박동안 회장의 세심한 보살핌과 배려로 2체급을 석권한다. 은퇴 후 결혼과 함께 2009년 충남 서산에서 월드 복싱체육관을 운영, 2자녀(단국대 물리학과 신지인양. 동국대 수학과 신지훈 군)를 교육하면서 방경호(한국체대)란 복싱 유망주를 배출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3년간의 영욕(榮辱)을 겪으며 쌓은 인내와 겸허한 자세로 후배 양성에 매진하는 <의지의 한국인> 신동길 관장의 건승을 바란다.
실패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은 잡초 복서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며, 체육인으로서의 열정과 교육자로서의 소명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끈기와 신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한국 체육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만하다.
조영섭 스포츠 기자 kwes115@naver.com
신동길 관장의 인생과 업적 정리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경기장면 신동길(우측)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경기장면 신동길(우측)
지난주 용복회(용인대 복싱 동문회) 운영위원장 조성관 후배의 추천으로 용인일보에 컬럼을 연재, 2회째를 맞이한다. 이번 주 컬럼의 주인공은 현재 서산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플라이급) 국가대표 신동길이다. 필자가 그와 처음 인연을 맺을 때가 1989년 8월 전국 회장기대회 대회였다. 당시 필자가 지휘봉을 잡은 용산공고팀의 플라이급 백달근의 8강전 상대가 바로 충남 예산 대흥고 3학년 신동길이었다. 경기를 앞두고 전력 분석을 위해 지난 그의 기록을 훑어본 필자는 깜짝 놀랐다. 1971년생인 신동길은 지난 88년 대흥고를 졸업할 때까지 각종 대회에 8차례나 출전하였으나, 단 하나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한 복서였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그는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89년 다시 3학년에 유급생 신분으로 복학했다. 이유는 단 하나 대학 진학을 하고 싶은 용광로(鎔鑛爐)보다 뜨거운 열망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89년 그해 2차례 전국대회에서 2차례 출전했지만, 8강에서 연달아 탈락 이번 대회가 11번째 메달 도전이었다. 그러나 신동길은 용산공고 1학년 백달근에 보기 좋게 판정패를 당하며 또다시 쓴잔을 마셨다, 이제 9월에 개최되는 마지막 대회(우승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신동길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자세가 아닌 마치 황산벌 전투에 국운을 걸고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로 임하는 계백장군처럼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메달 사냥에 도전한다. 결국 신동길은 4게임 연속 R.S.C 승을 거두면서 복싱을 시작한 지 <3년 4개월> 만에 감격 적인 첫 우승을 차지한다.
대학 시절, 역전의 시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나고 자란 충남 예산은 필자의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수록된 백제 부흥 운동의 시발(始發)점이었던 임존성이 있는 고장이다. 바로 그곳에서 흑치상지 장군이 백제 유민을 이끌고 나. 당 연합군과 투쟁한 기간이 공교롭게도 신동길의 정상 도전 기간과 동일한 <3년 4개월>이었다. 한편, 이때 심판석에서 매의 눈으로 우승을 차지한 그의 경기를 예의주시한 관계자가 있었다. 바로 경희대학 양행석 복싱 감독이었다. 결국 그분에 의해 신동길은 특기생으로 발탁되어 경희대로 진학한다. 90년 경희대에 진학한 신동길은 2년 동안 각종 선발전에서 임덕민(서원대) 박형연(용인대) 이해준(한체대) 김진수(서울시청) 등 4명의 선수에게 기록적인 7연패를 당한다.
1993년 경희대 3학년에 올라서면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신동길은 훈련에 매진 그해 동아시아 대회 은메달 남기춘(경희대)과 이광호(원광대) 서울컵 은메달 이해준(한국체대) 등을 차례로 꺾고 전국체전을 포함 4관왕을 달성한다. 그리고 졸업반인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 8강에서 올림픽(애틀랜타) 대표 출신 배기웅(한국체대)을. 4강전에서 93년 제7회 세계 선수권(핀란드) 국가대표 이근식(한국체대). 결승전에서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전인덕 (원주시청)을 차례로 제압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대미를 장식하고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그러나 신동길은 본선 8강에서 일본의 나까조노 선수와 맞대결 주도권을 잡고 경기를 우세하게 펼쳤지만 지독한 홈 텃세에 밀려 메달권에서 억울한 판정패를 당한다.
프로 전향과 은퇴 후 기여
경희대를 졸업하고 청양군청에 입단한 신동길은 물오른 원숙미를 자랑하며 96년 97년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한다. 그리고 75전 60승 (32KO. RSC) 15패의 전적을 남기고 박수를 받으며 링을 떠난다. 잡초 복서 신동길은 2000년 노화에 따른 기량 저하(Aging Curve)를 그리는 30살이 되어 신도체육관 소속으로 프로에 전향 KBC(한국 권투위원회) 플라이급 슈퍼플라이급에서 박동안 회장의 세심한 보살핌과 배려로 2체급을 석권한다. 은퇴 후 결혼과 함께 2009년 충남 서산에서 월드 복싱체육관을 운영, 2자녀(단국대 물리학과 신지인양. 동국대 수학과 신지훈 군)를 교육하면서 방경호(한국체대)란 복싱 유망주를 배출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3년간의 영욕(榮辱)을 겪으며 쌓은 인내와 겸허한 자세로 후배 양성에 매진하는 <의지의 한국인> 신동길 관장의 건승을 바란다.
실패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은 잡초 복서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며, 체육인으로서의 열정과 교육자로서의 소명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끈기와 신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한국 체육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만하다.
조영섭 스포츠 기자 kwes115@naver.com